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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Aug 12. 2024

알지 못한 채 허우적대기

<빨간 비둘기>


삶의 규칙을 배우기도 전에 일단 살아야만 하는 게 우리의 신세다. 그래서 미켈레(난니 모레티)는 우리와 같은 처지다. 기억을 잃었지만 당장 수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가롭게 게임의 법칙을 배울 틈도 없이 그는 일단 수영하고 공을 주고받으며 골을 넣어야 한다.     


그런데 수구 경기장에서 기억―자기를 규정함으로써 매 순간 어떻게 결정하고 행동할지를 정하게끔 하는 것―을 잃은 것은 미켈레만이 아닌 것 같다. 감독이든 선수든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결단하고 움직이기보다는 각자의 멘토에게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자든, 정신분석자든 간에 모두가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있다.     


<빨간 비둘기>의 인물들은 대화하지 못한다. 서로 꿈을 꾸고 있다는 공통점만 있지 꿈의 내용이 너무도 달라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속 모든 인물은 자기의 말만 몇 차례씩 되풀이한다.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이런 식이다.)     


미켈레는 이러한 엉망 속에서 건강한 언어, 자신의 결정에 따른 언어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해왔던 대로, 편견에 의한 언어를 쓰면 생각 역시 기성의 항로를 따르게 되고, 그렇다면 행동 역시 기존의 반복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는 없는데 다른 모든 게 불확실하지만 기존의 판이 망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성은 힘이 세다. 미켈레는 새롭게 따져볼 것이라 굳게 결심했지만,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페널티샷 순간에 여태 해왔던 것처럼 왼쪽을 선택한다. 한참을 오른쪽으로 던지리라 생각했음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왼쪽을 택한 것이다. 아니, 택했다기보다는 습관에 의해 택해졌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경기에서 패배한다. (물론 이때의 오른쪽은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찬사라기보다는 하지 않았던 것을 상징할 것이다.)     


절망에 빠진 미켈레. 모든 사람이 꿈을 꾼다는 면에서 같지만, 서로 통하지 않는 꿈을 꾼다는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통감한 그는 극도의 혼란을 겪는다. 미켈레가 탄 차는 이번에도 이탈한다. 카메라는 어느새 유년 시절의 주인공을 비추는데 여기서 모든 이는 붉은 해라는 각자의 이상에 손을 뻗고 있다. 각각의 욕망과 관념과 희망을 모조리 녹여내는 새빨간 태양에.     


어린이 미켈레는 그 꼴이 우습다. 저 붉은 색은 소련 또는 사회주의와 함께 몰락할 것이고, 저 태양은 세상의 중심을 자부하던 신처럼 얼마 못 가 죽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간절한 손, 희망에 찬 눈, 한 명도 빠짐없이 거기에 매달리는 절박함, 다시 말해 우리 모두의 목표들, 부질없는 것들, 이 모든 것들이 무너질 건 자명한데 나아갈 곳은 어디인가.     


코미디임에도 주변에서 자는(조는 게 아니었다) 이가 많았다. 무려 서울아트시네마였는데도 말이다. 나도 힘들게 봤다. 상징의 직접성 때문인지, 말이 너무 많았던 탓인지 조금은 피곤했다. 어디선가 보기로 평론가 정성일은 이 영화를 모레티 최고 작품일 뿐만 아니라 80년대 최고작 중 하나라고 말했다는데,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정보라 생각해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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