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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현 May 24. 2022

자본주의의 무한한 소용돌이: 연극 <보이지 않는 손>

출처: 연극열전


 대학로 연극에서 하나의 브랜드라 칭해지는 연극열전의 작품 <보이지 않는 손>이 무대 위에 올랐다. 연극열전은 시리즈마다 명확한 컨셉을 구축하고 체계적인 기획 시스템을 기반으로 작품을 개발해온 것이 특징이다. 연극열전 9는 ‘무대예술의 생생한 현장성과 삶을 향한 메시지로 가득 찬’ 라이선스 초연작을 공연하고 있다. 이는 펜데믹으로 삶의 모습이 뒤바뀌었던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연극을 통해 인간 ‘삶’의 모습을 직시하겠다는 의지로 느껴진다. 


 연극 <보이지 않는 손>은 파키스탄에서 파견 근무 중인 미국인 투자 전문가 닉 브라이트가 한 무장단체에 의해 납치된 상황을 보여준다. 사실 본래 납치 대상은 닉의 상사였지만, 닉이 상사를 대신해 차를 타는 탓에 잘못 납치당하게 된 것이었다. 분명한 실수였지만, 그들은 닉을 풀어줄 생각도, 이유도 없었다. 연극은 공간의 변화 없이, 납치된 닉이 갇힌 파키스탄의 한 감옥 방에 인물들이 오가면서 진행된다.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높은 회색빛의 벽이 세워져 있고 오른편에 밖으로 통하는 철문이 굳게 닫혀있다. 사람 한 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폭이 좁은 철제 침대가 놓여있고 그 위편에 작게 철창살 창문이 나 있다. 이 공간만 보아도 상당히 제한적이고 위협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출처: 연극열전


 극은 납치된 닉과 어린 조직원 다르가 마주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닉은 다르에게 라마단 기간에 감자를 통해 돈을 버는 법을 알려주고, 다르는 실제로 그 방법을 이용해 수익을 낸다. 다르는 돈을 벌 수 있게 도와준 닉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인질과 감시병의 관계이지만, 익숙하게 닉의 수갑을 풀어주고 닉이 다르 어머니의 안위를 묻는 행동에서 둘은 꽤 친밀한 관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조직원 바시르는 다르가 조직 몰래, 이자가 붙는 개인 계좌에 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이자는 이슬람 율법에서 금지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바시르는 조국 파키스탄을 위한 혁명을 꿈꾸면서 단체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다. 다르의 잘못된 행동을 알아채자 단번에 그를 폭행하고, 욕을 내뱉으며 닉을 위협하는 폭력적인 인물이지만,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하고 있는 무장단체의 지도자 이맘 살림에게는 강한 충성을 보인다. 


 무장단체는 닉의 몸값으로 막대한 돈을 요구하고 회사와 국가 모두 닉의 구출을 포기한다. 결국, 닉은 옵션거래를 통해 스스로 자신의 몸값을 벌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맘 살림은 닉에게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들에게 천만 달러를 벌어준다면 그를 풀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닉은 예상치도 못한 높은 금액에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닉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래를 받아들이고 바시르와 함께 본격적인 투자 작업에 들어간다. 닉은 경제와 투자, 주식에 문외한인 바시르를 가르치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파키스탄의 시장 정보를 수집해나간다. 경제나 투자 개념을 알지 못하고 있는 관객도 바시르의 입장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레 그 흐름을 이해하게 된다. 극 초반부에 나오는 전문적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서사를 따라가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용어의 이해가 아닌, 그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자본주의에 눈을 뜬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변해가는가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감옥이라는 폐쇄적이고 제한적인 공간 설정이지만, 극적 상황에 따른 공간 내부의 변화가 상당히 두드러진다. 닉과 바시르가 옵션거래를 준비하기 시작함에 따라서 감옥에는 작업용 책상이 들어서고 황량하게 비어있던 벽은 수많은 주식, 투자 정보가 적힌 종이들로 가득 메워진다. 닉은 신문과 바시르로부터 얻은 테러 정보를 바탕으로 시장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해내고 닉의 예상대로 시장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바시르의 정보대로 실제 테러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거래 과정에서 주가가 더 내려가기를 기다리자고 고집하던 바시르로 인해 의견의 충돌은 있었지만, 닉과 바시르는 기초 자본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70만 달러라는 수익을 낸다. 시장이 중단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6분이었다. 권력 있는 자들이 더 이상의 자금 손실을 막기 위해 벌인 행동이었다. 더 큰 수익에 욕심이 났던 바시르의 주장을 따랐다면, 모든 돈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몇 초의 차이로 엄청난 수익이 생길 수도, 손실이 생길 수도 있는 경제 시장의 특성이 드러난다. 사실 바시르는 첫 거래를 성사하기 전,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가르치려고 드는 닉의 태도에 분노했지만, 눈앞에서 모든 상황을 목격한 그의 태도는 점차 변해간다. 자신의 시각으로 유의미한 시장 정보를 파악하기 시작하고 닉의 논문을 찾아 스스로 공부하며 투자와 거래, 그로 벌어들이는 수익들에 진정한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맘은 닉과 바시르가 만들어낸 첫 수익에서 40만 달러를 인출해 백신을 구입하는 데 사용한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닉은 이맘에게 항의하지만, 모두 민중의 건강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한다. 바시르도 이맘이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를 옹호한다. 사실 백신의 가격은 4만 달러밖에 하지 않았고, 그 남은 돈 모두를 이맘이 가로챈 것이었다. 그 후에도 이맘은 닉을 이용해 비밀리에 회계 장부 정리를 부탁한다. 이맘이 국가로부터 자금의 출처를 의심받기 시작하자, 닉은 자금을 비유동자산인 부동산으로 바꾸어 의심을 피할 수 있는 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맘은 닉의 조언대로 행동하지 않고, 아내의 명의로 대저택을 매입해 사적 재산을 키우려고 한다. 그렇게 이맘도 닉이 벌어들이는 자본 앞에 욕망을 드러내고 이슬람 종교의 법체계와 규칙에 따라 운영되고 있던 무장단체도 분열되기 시작한다. 


출처: 연극열전


 바시르도 단순히 단체에 돈을 벌어다 주는 데 멈추지 않는다. 본래 바시르는 미국과 그들이 지배한 자본 시스템에 대한 강한 혐오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찰나의 시간에 수억 원이 오가는 상황을 겪은 뒤, 의도적으로 시장 상황을 조정해 수익을 낼 수 있을 거라는 위험한 생각까지 나아간다. 동시에 이맘에 대한 의심이 커진 바시르는 다르를 이용해 이맘의 뒤를 쫓고, 그의 자금 횡령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이맘은 바시르에게 붙잡히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닉의 감옥 방에 갇히게 된다. 이맘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부동산을 매입하라고 조언한 닉의 탓으로 돌린다. 


 이 모든 상황에 중심에 있는 닉은 미국인으로서 오만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미국이 파키스탄의 자본을 빼앗아갔다고 말하는 바시르와 달리, 닉은 미국이 세계 경제 시장과 통화를 안정화했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기회주의적이고 상황 판단이 재빠른 모습이다. 이를 이용해 이곳을 탈출해 가족에게 돌아갈 방법을 스스로 생각해낸다. 본격적인 옵션거래를 시작할 때는 관계를 역전시켜 바시르에게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자, 단번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빌고 엉터리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그저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있기를 애원한다. 닉은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홀로 피폐해져 가고 목숨을 부지해주었던 투자, 주식 정보가 가득 적힌 종이들은 휴지 조각으로 전락해버린다. 바시르와 다르가 다시 닉을 찾아왔을 때는 모든 힘이 빠져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 제대로 거동조차 하지 못한다. 파키스탄 경제 시장을 손에 넣고 치밀한 계산으로 막대한 이익을 내던 닉이었지만, 그저 한낱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음이 앞선 모습과 대비되어 드러난다. 


 닉에게 진심 어린 호의를 베풀던 다르도 변해간다. 더는 갇혀있는 닉을 돕지 않고 오히려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닉의 발에 직접 쇠사슬을 채운다. 바시르를 따르며 감옥에 닉을 오랜 기간 홀로 방치하는 데 동조한다. 또한, 닉을 시험하려는 아맘의 의도에 따라 닉에게 총까지 겨눌 정도로 이맘에게 충성했던 다르였지만, 바시르를 돕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맘을 살해한다. 감옥 밖에서 이맘을 무참히 살해한 뒤 다르가 돌아오자, 캄캄한 감옥에 놓여있던 손전등이 다르를 비추고 그의 뒤에 큰 그림자가 생겨난다. 다르가 닉에게 다가설수록 그림자는 점점 거대해지고, 이는 이전의 모습은 잃은 채로 변질되어버린 다르의 모습을 표현적으로 드러낸다. 


 인물들 간의 긴장 관계와 변화, 감정의 다층적인 층위를 세밀하게 표현해낸 배우들의 기량과 앙상블이 단연 돋보였다. 단순한 무대 구성은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하도록 했고 첫 옵션거래에서 긴박한 상황 속에 놓인 닉과 바시르가 빠르게 주고받는 대사의 흐름은 극에 강렬한 몰입도를 더했다. 특히 바시르 역의 김동원 배우는 무자비하고 냉소적인 무장단체원에서 왜곡된 혁명가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구현해냈다. 영국 사회에서 파키스탄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주변부로 밀려났던 과거에서 오는 열등감과 분노를 표현하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자본주의와 보이지 않는 손을 경험하면서 가시화되는 섬뜩한 욕망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또한, 감옥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 모든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에 자칫하면 극이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정교하게 구축한 무대 동선, 속도감 있는 장면 구성과 대사의 흐름을 통해 극의 후반부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연출력이 뛰어났다. 


 이맘이 살해되고 수십 일의 시간이 흐른 뒤 돌아온 바시르는 이맘의 옷을 입고 있다. 이제 바시르가 이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는 닉에게 배운 투자 기술을 악의적으로 활용해 의도적인 폭탄 테러를 자행했고 그 테러로 파키스탄 화폐 가치를 폭락시킨다. 바시르는 끝내 자신이 의도한 대로 엄청난 이익을 거두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혁명을 위한 자금이라는 명목 아래 무고한 사람들을 대거 살해했고 파키스탄을 전쟁과 폭력으로 가득 찬 혼돈의 세계로 만들었지만,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바시르가 그토록 외치던 민중을 위한 혁명가가 아닌, 자본주의 속에서 완전한 괴물이 된 모습이다. 더 이상 닉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바시르는 닉을 풀어준다. 감옥에서 나온 닉의 머릿속에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그 파편적인 모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모든 것이 어지럽게 흐트러진 무대에서 닉이 손에 쥐고 있던 돈뭉치들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고 극은 막을 내린다. 


 극 속에서 닉과 바시르가 거래에 핵심적으로 활용한 것은 ‘풋옵션’이었다. 풋옵션은 미리 정한 가격으로 특정 시점에 자산을 팔 수 있는 권리로, 주가가 떨어졌을 때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이다. 기업에 치명적인 손해가 있어야만 수익을 낼 수 있다. 즉, 이 거래의 성공은 누군가의 추락으로 완성된다. 오로지 자본을 위해서 짓밟히고 희생되는 것들. 수익을 위해서 그 추락의 순간을 간절히 기다려야만 하는 역설. 이것이 연극 <보이지 않는 손>이 자본주의 속에 놓여있는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 아닐까.



*연극 <보이지 않는 손>은 2022년 6월 30일까지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공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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