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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현 Jun 04. 2022

서로 다른 고독이 있기에 - 연극 <일분위 고독인>


 고독 관리사는 묻는다.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지, 그것을 입증할 근거는 있는지.  물음에 아진은 방에서 홀로 시를 쓰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로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에  쓰기는 생산 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아진에게는 시인이라는 직업이 있지만, 시를 쓰는 것은 단순한 취미 행위로 분류된다. 아진의 시가 담긴 시집에는 어떤 눈길도 주지 않는다. 외롭지 않다는 아진의 말은 고독 관리사에게는 무의미하다.  번의 형식적인 질문만으로 아진은 치료가 필요한 위험군인 1분위 고독인으로 최종 판정받는다. 1분위에 속한 그는 과연 고독한 인간일까.


 연극 <일분위 고독인>은 고독을 1분위부터 10분위까지로 구분해서 체계화하고 관리하는 사회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들이 겪는 고독의 문제를 다룬다. <일분위 고독인> 속 세계에서 고독은 적극적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하나의 질병으로 분류된다. 고독인들의 고독 분위를 상승시키기 위해 전문적으로 그들의 생활을 점검하고 파악하는 고독 관리사라는 직업도 존재한다. 이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고독의 정도를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서 파악하고 사람을 구분해내는 것이다. 한 인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지는 고려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편안한 1분위와 불편한 10분위

 극장에 들어서면 전반적으로 비어있는 무대와 함께 오른편 기둥 뒤에 놓인 나무의 모습이 단연 눈에 띈다. 무대 오른편에 놓인 나무는 흰색과 초록색, 주황색이 뒤섞인 조명을 받아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와 함께 전반적인 푸른빛의 조명이 무대 바닥을 채운다. 왼편에는 서로 맞닿아있는  개의 테이블과 의자 역할을 하는 큐빅 모양의 상자들이 놓여있다. 어떤 특별함도 없는 검정색의 소도구들은 무대의 공백과 맞물려 공허하고 차가운 인상을 준다.


  극의  장면에서 고독 분위를 판정받는 아진의 옆에서 고독 관리사 유나는 3분위 이하의 고독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진행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 고독의 위험성을 역설하는데  교육의 대상은 관객이다. 무대에  교육을 듣고 있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나는 관객들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고 고독인들을 교육하는 유사한 장면이  중반에도 등장한다. 그렇게 관객들도 낮은 분위를 판정받은 고독인의 입장에 놓이게 된다.


 아진은 1 가구이자 경제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1분위 고독인이 되었다. 1분위 고독인은 생활 반경에 제한을 받고 더는 경제 활동에도 참여할  없다. 사회적 활동 없이 국가에서 지정한 최저 생계비를 받으면서 생활해야만 한다. 그들은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범죄를 일으키거나 고독사할 확률이 현저히 높은 존재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다른 방지책으로, 1분위 고독인은 최고 분위인 고독 10분위 가정에서  달간 생활하는 ‘고독 교류 시스템 참여하도록 강제된다. 낮은 고독 분위의 사람들은 세로토닌을 주입하는 행복 주사도 주기적으로 맞아야 하고 이를 거부하면 생활비 지급마저 받을  없게 된다.


 스스로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진은 자신이 1분위 고독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지만, 1분위 판정으로 인해 달라진 차가운 현실과 마주한다. 더는 아르바이트도   없고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방에서 1분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집주인이 고독사할 위험이 높은 사람을 더는 받을 이유가 없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진은 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자신만의 오롯한 공간이 필요했다. 고독 분위를 올려  익숙하고도 편한 공간을 지키고자 고독 교류 시스템에 하루빨리 참여하기로 한다.


 아진은 10분위를 오랜 기간 유지하고 있는  가정집에서  달을 보내게 된다. 그곳은 고독 관리사로 일하는 엄마 모은과  유나, 고등학생 준서의 집이었다. 특이한 점은 모녀 관계인 모은과 유나의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보이고 작가인 유나의 아빠는 세계여행을 다니고 있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0분위이기 때문에, 유나는 특채로 고독 관리사가 되었고 가족들은 넓고 쾌적한 집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외부인임에도 집안 곳곳에서 시를 쓰며 편안해 보이는 아진과는 달리, 유나의 가족은 자신들의 집이지만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서울 지부장 선거를 준비하고 있는 모은은 긍정적인 평판과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작은 민원 하나도 투표와 직결될  있기 때문에 문제가  가능성이 있는 모든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존댓말과 함께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로 엄마를 대하는 유나도 왠지 모르게 경직된 모습을 보인다. 편안해야 하는 집이지만, 모은과 유나는 흰색 블라우스와 말끔한 정장 바지, 구두 차림을 하고 있다. 반항심이 가득한 모습의 준서는 아진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준서가 집에서 하는 유일한 행동은 캐치볼이다. 아무것도 없는 벽과 마주 보고 서서 혼자 공을 던지고 잡기를 반복한다.


 함께 살아가는 것의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고 있어야 할 10분위 유나 가족은 누구보다도 공허하다. 고독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단편적으로 판단해 구분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가.      


고독을 ‘다시’ 보기

 유나는 자신이 처음 맡은 고독인인 할머니가 죽자 혼란을 겪는다. TV  채널에 일정 시간 머물면, 담당자 유나에게 고독사 경보음이 울렸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유나는 곧장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점을 이용해서 자주 유나를 집으로 불렀다. 유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할머니는 따뜻한 밥과 사탕들을 내어주었다. 할머니에게는 원칙에 따른 체계적인 관리보다 곁에 있는 사람과 나누는 진정한 대화와 온기가 필요했다. 끝내 할머니는 홀로 죽음을 맞는다. 일주일 전부터 TV 아예 켜지 않았기 때문에 유나에게 고독사 경보음이 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일률적인 기준을 가진 시스템의 허점과 모순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1분위라는 고독 분위에 따르면 아진도 지나치게 외롭고 고독사할 위험성을 가진 존재여야 하지만, 현실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유나의  마당에 놓인 나무를 바라볼  있는 여유가 있고 혼자 캐치볼을 하는 준서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면서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치기도 한다.  동인 모임에 나가, 예술 동료인 시동과 함께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일상에서 작은 즐거움을 누린다. 다른 인물들의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연기와는 달리 시동 역할을 맡은 배우는 유일하게 과장되고 익살스러운 연기를 보인다. 이는 자연스럽게 관객의 웃음을 유발했고 아진이 동인 안에서 느끼는 거짓 없는 행복감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아진은 무엇을   행복한지 알고 있고, 외로움과 고독은 다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고독하기는 해도 외롭지는 않은 존재라고 말하고, 그렇게 혼자 있는 고독의 시간을 즐기면서 창작의 영감으로 활용할  아는 사람이다.


 그에 반해, 10분위인 유나 가족은 숨겨둔 진실과 서로 간 소통의 부재로 인해 각자의 방식대로 외로움을 겪고 있다. 사실 여행 작가라는 유나와 준석의 아버지는 모은에 의해 살해당했다. 남매를 입양하기 전, 모은은 남편으로부터 가정 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아이가 있다면 화목한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두 아이를 입양한다. 하지만 남편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고 모은은 술에 취한 채 또다시 자신을 폭행하려 했던 그를 살해하게 된다. 남편의 시체는 나무 밑에 묻어 은폐해 버린다. 초등학생이었던 유나는 이 모든 상황을 목격했고 결국 진실을 숨기는 데 공조하게 된다. 매일 아버지의 여행 소식이 업로드되던 SNS도 유나가 거짓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10분위가 되기 위해서 남매를 입양한 것만은 아니었고 유나가 기억하듯이 아이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도 보였지만, 남편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에 안정된 가정에 대한 입증의 갈망은 심해져만 갔다. 유나는 아버지의 죽음과 달라진 엄마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지만, 정신적 혼란을 겪는다.

 준서도 자신의 입양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엄마가 입양 가산점을 받아 10분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입양했다고 확신한다. 반항 어린 마음에 원래 하던 야구를 그만두고 학교에서도 어긋나게 행동하고 있던 것이었다. 가족들이 자신에게 관심 가져주기를 바랐지만, 혼자 외롭게 캐치볼을 하는 준서에게 말을 건네는 가족은 없었다. 모은도 유나도 그런 준서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준서에게 먼저 다가선 것은 1분위인 아진이었다. 그런 아진은 마당의 나무를 보며 시를 쓰다,  나무가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겉보기에 울창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버린 나무처럼 유나의 가족은 인위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다.


 사회적 시스템은 단순히 고독을 외로움과 동일시하고 고독으로부터 부정적인 것들이 유발된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아진이 느끼는 것처럼 고독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돌아볼  있게 하고 유나의 가족처럼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과 함께 있기 때문에 외로워지는 순간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렇듯 극은 청년 고독, 노인 고독과 같이 ‘고독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현재,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형식뿐인 사회시스템을 비판하는 동시에 고독이라는 감정이 가진 다양한 층위를 성찰하도록 한다.


 유나는 끝내 아버지의 죽음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지만, 유나의 설득에도 모은은 진실을 끝까지 숨기려 한다. 하지만 마당의 나무가 무너지면서 유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났고 유나 가족은 4분위로 강등된다. 극은 유나의 생일날, 유나와 아진이 우연히 마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유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진은 가방에 있던 조각 케이크와 촛불을 건네고 급하게 버스를 타러 떠난다. 유나와 아진이 함께 생일을 축하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아진은 생일은 자기 자신이 축하해 줄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말을 건네고 사라진다. 포장을 뜯지도 않은 케이크를 들고 높은 곳에 서 있는 유나의 모습은 어딘가 홀가분해 보였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연극 <일분위 고독인>은 홀로 겪을 그 고독의 시간이 가져다줄 분명한 무언가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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