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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현 Jan 05. 2022

'나'이기에 전할 수 있는 말들

극단 Y 연극 <제1강 거절하는 방법>


공연이 시작되면 4명의 여고생들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의 페이스를 찾기 위해 매일매일 운동장을 뛰는 현, 그런 현을 좋아하게 된 리아, 학교에 친구가 없는 선주, 현이의 유일한 단짝 친구인 미소까지. 넷은 선우여자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다.


학교에서 여자 좋아하는 애로 소문이 나있는 리아는 사랑에 거침이 없다. 현이를 좋아하게 되자, 운동장을 뛰는 현이의 앞을 가로막고 말을 걸고 적극적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미소에게 현이를 위한 편지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한다. 미소는 현이와 리아의 중간에 껴서 전달책 역할을 해야 하는 게 뭔가 싫지만, 이야기하지 못한다. 왜냐면 리아에게 상처를 줄까 봐. 미소는 그게 무서웠다. 현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가장 거절을 못하는 사람은 현이었다. 엄마가 없는 현에게 미소의 부모님은 계속해서 음식을 챙겨주셨다. 현은 자신을 불쌍하게만 여기는 것 같아 불편했지만 아무 말없이 도시락을 받는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답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챌 때까지 그저 숨어버렸다.


리아의 갑작스러운 고백에도 현은 대답하지 못한다. 리아가 예쁘고 좋지만, 사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리아는 자신에 대한 현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래서 친구 선주와 함께 토요일마다 작은 수업을 진행하기로 한다. 바로 <거절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전교 3등인 똑똑한 선주가 수업 진행을 맡아 친구들에게 곤란한 상황에서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세세한 예시로 거절하는 법을 설명하고, 또 하루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시간표를 마음대로 바꿔놓는다. 'SEX, 개그, 요리, 여행' 등등. 그 후에 모두 일상에서 꼭 거절을 해보자고 다짐하지만, 모두가 실패한다. 그 이유는 상대방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습에서는 상대가 날 이해해주고 거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막상 거절의 말도 입에서 잘 나오지가 않았다.


네 명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삐걱거림이 일어난다. 선주에게 리아는 유일한 친구였지만, 리아는 학교에서 선주에게 아는 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선주는 자신과 달리 반짝거리는 리아를 사랑했다. 자신에게는 없는 아름다움을 리아에게서 발견했다. 하지만 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상처받기 싫어서 몸집을 부풀렸고 반짝거림 따위는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미소는 현이가 불쌍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 불쌍했다. 가끔은 미웠지만, 또 밉지 않았다. 어떻게 한 마음에서 이런 생각들이 나오는지 미소는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각자가 가진 생각은 뒤엉키고 부딪히면서 생채기를 남겼다.



그 시절의 우리는 복잡하고 어려웠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소문이 한순간에 퍼져나가기도 했고, 그 소문을 믿기도 했다. 혹은 아닌 걸 알면서도 나서서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작은 말 한마디로 친구와 싸우기도 했고 내가 한 행동에 후회하면서 울기도 했다. 옆에 있는 친구를 시기하고 부러워했지만, 그 마음을 숨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고, 상처받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바랬던 대로만 흘러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는 아프게 깨달았다.


극의 마지막에서 30대가 된 네 명의 친구는 17살의 나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17살의 리아에게, 현에게, 선주에게, 그리고 미소에게. 시간이 흘러서야 숨겨져 있던 것들을 친구들은 깨닫는다.


선주의 엄마는 리아가 집에만 놀러 오면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17살의 선주는 엄마가 리아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0대의 선주는 안다. 리아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리아가 아니어도, 외로워 보이는 딸의 친구였다면 엄마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17살의 미소가 선주에게 넌 정말 똑똑하고 멋있다고 말해주었던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기억이 되는지도 알고 있다.


30대의 리아는 알고 있다. 앞으로 쪽팔릴 일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랑에 당당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미소는 사람에게 실망하지만, 사람에게 다시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긍정적인 부분보다는 부정적인 부분에 눈길이 가고, 이겨내기 힘든 순간들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덤덤히 털어놓는다.


어른이 되어서야 나만의 공간을 가지게 될 현이는 깨닫는다. 운동장을 매일 뛰면서 찾아 헤매던 나의 페이스가 매번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기억하지 못한다. 고등학교 시절 왜 우리가 시간표를 제멋대로 뜯고 재조합해서 만들었는지를 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현이에 대한 리아의 마음, 모든 걸 거절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 등 많은 것이 엮여있다. 17살의 순간에는 엄청났지만 시간이 흘러 그런 것들은 무뎌진다.


그렇게 30대가 된 네 친구들이 17살의 나에게 편지를 쓰면서 극은 마무리된다.


마지막 네 명이 각자 자신에게 보내는 이야기에서 눈물이 왈칵 났다. 지금 나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 시간이 흘러서 무뎌져야만 비로소 나에게 내가 건넬 수 있는 위로의 말들. 마냥 긍정적이고 행복할 수는 없는 삶의 굴곡들. 그걸 전하는 인물들의 얼굴과 목소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니 찬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 바람을 맞으면서 정류장을 향해 걷는데 마지막에 허공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미소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가장 힘든 경험과 기억들을 가득 안고 있던 미소. 네가 조금은 더 행복해지기를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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