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바닥에 용암이 흐른다. 술래 역할인 아빠는 용암에 사는 괴물이다. 미끄럼틀 위로 도망치는 아이들, 용암에 사는 괴물은 놀이기구 위로 올라올 수 없다.
집에 돌아오니 안방에 괴물이 잠들어있다. 식탁 위에 비어있는 소주 병과 맥주 캔, 'zero sugar' 라고 적혀있다. 건강을 생각하는 괴물이다. 아내의 침대 위에 샤워하지 않은 자는 누울 수 없다.
결혼 후 나를 관통하는 주된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왜 삶이 개선되지 않을까?'
부모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도 취업과는 무관한 진로였다. 부모가 원하는 결혼을 해도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결심하고 실행해야 오래 굴러간다. 아이 가지기를 주저한 것 역시 개선되지 않는 삶에 대한 이해때문이었다. 더 나아질 기대가 없으니 현실을 수긍하고 만족하자. 이 게 내 결론이었다. 자포자기만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가겠지. 타인의 속도에 맞추기보다 내가 원하는 방향과 속도에 집중했다.
남편을 감정과 경제력에 인색하다고 평가한 아내의 주된 기조는 욕심이었다. 팬트리에는 대피소처럼 1개월 이상을 생존할 수 있는 간식과 라면이 구비되어 있어야 안심했다. 분단국가의 아내답다. 문제는 유통기한이 짧은 식료품을 소비하지 않는 패턴이었다. 냉장고 안을 뒤적이면 부패한 음식이 자수하듯 나온다. 뭐든 채워야 안심하는 아내였지만 남편은 아내에게 수갑을 채울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독식, 배고픔은 늘 다음 끼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도망치듯 음식을 먹어치워도 다시금 허기짐이 찾아온다. 가진 것 이상을 바라거나 쓰는 것, 그 게 바로 욕심이다. 아내는 타인이 가진 부와 애정을 부러워한다. 3동 아빠는 어린이집 운동회에서 유일하게 아내의 손을 꼭 잡고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맞은편 홍팀의 애정행각을 보고하는 아내의 불만을 빠르게 진화하지 못했다. 아내가 먼저 나에게 팔짱을 끼었다. 나는 검거 당하듯 붙잡혀 순순히 자백한다.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