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상호작용이다. 생각이 건강하면 말도 곱게 다듬어 표현한다. 각각 다른 색의 사람들이 만나 입과 귀로 형태와 질감을 상상한다. 어떤 이와는 대화의 합이 잘 맞지만 또 어떤 이는 접점 하나없이 다른 삶을 살아왔다. 점 하나에 남과 님이 오간다.
말이 그립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대화를 나눠본적 언제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내의 시계는 결혼 전 시간에 멈춰버렸다. 그때 그 다정했던 남편을 박제하고는 지금의 남편은 껍데기만 같은 다른 사람이라 여기고있다. 그런 아내는 만담꾼보다 소리꾼에 가깝다. 주로 잔소리나 앓는소리 위주의 명창이다. 나는 회피형 사람인지라 시끄러운 소리를 멀리한다. 아내를 멀리하니 부처와 예수가 손짓한다. 호형호제들께서 마련한 식사자리는 늘 최후의 만찬장이다. 틈만나면 입을 열고 뻐꾹거리는 아내의 마음에 못질을 해둔뒤로 더이상 새가 찾아오지 않는다.
건강한 대화가 그립다.상대의 말에 경청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사뭇 멀다. 대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피부나 눈동자 색을 관찰한다. 이야기 후반부를 예측하다 살포시 어긋난 방향으로 흐른다. 부표없이 떠돌다 만나기를 반복한다. 너와 내가 그랬다.
늦은 저녁 오토바이로 음식 배달을 하다보면 옆자리에 정차해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기사님이 계신다. 같은 처지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는 느낌이랄까.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수고하십니다" 하고 운을 떼었다. 내 아버지뻘로 보인다. 직좌 신호로 바뀌면 황급히 인사하는 짧은 대화다. 각자의 픽업지와 전달지로 스로틀을 당긴다. 둘 다 전기 오토바이다. 어릴적 아버지께서 집에 돌아오시면 왜 그리도 나를 부둥켜안고 부비적하셨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자정 무렵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곤히 잠들어있다. 아빠에겐 한 두 마디쯤이어도 적당한 대화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몸의 대화만큼 언어의 대화도 그립다. 우리의 시간은 종착역에서 출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신호가 푸른색으로 바뀌지 않았다.
주말이면 아들과 집앞 편의점에 온다. 착한 일을 해서 받은 용돈과 추석 용돈, 어른들이 주신 용돈으로 1+1 행사상품 음료 하나를 아빠에게 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