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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지 Oct 28. 2024

가호

허영의 바다에 파도가 들이친다. 편리함, 국민템, 고민과 클릭 사이가 가까울수록 배송 시간이 줄어든다. 문 앞에 택배 상자가 쌓일수록 삶이 편해질까. 문 열기가 겁난다. 택배 상자로 가로막혀 갇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내다본다. 종이상자, 스티로폼, 비닐 포장 위 송장이 붙어있다. 송장처럼 딱딱해진 아내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까. 아내의 욕심을 소금으로 채울 길 없다. 다시 파도가 몰려온다.

[시골도 아니고 다들 애들 데리고 경기도 혹은 근처 도시까지 놀러들 다니는데 우리는 뭔.. 신축 아파트에 사는 거 빼곤 월세만도 못하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건물 꼭대기에 수영장이 있었고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주인에게 덤벼드는 깃털을 단 인간, 날카로운 칼로 꼬리를 도려내자 마침내 저주에서 풀린다. 아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검은 하늘을 바라본적 언제였던가. 왕복 사차선 도로 중앙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족히 열에서 스무 명 남짓은 되어보인다. 반대편 차선에 스크레치 난 미니쿠퍼, 중앙선을 통과한 하얀색 PCX 오토바이가 누워있다. 그 옆에 중앙선을 넘어오지 못한 운전자가 꼼짝없이 누워 신음소리만 내고 있다. 전달해야 할 음식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개미를 보았다. 어린 아이의 장난으로 한 마리가 부상을 당하자 뒤에 따라오던 개미가 곁으로 다가와 더듬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 배달을 하는 사람들이 떠올렸다. 나 또한 그 작은 개미들 중 하나였다.

분기 당 한 번은 사고 위험에 노출된다. 언제가 내 차례인지 순번은 알 수 없다. 휴대폰 화면엔 3,4천 원 짜리 업무를 수락할지, 거절할지를 재촉한다. 고민과 클릭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앞차와의 간격이 좁아진다. 조금만 더 생각, 아스팔트의 울렁거림에 손가락이 방향을 잃는다. 정면을 바라본 순간 우회전 횡단보도 점멸 신호에 멈춰있던 차량의 후미가 가까워졌다. 전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빨리 달렸던 탓에 앞 차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양 손으로 브레이크 레버를 당기자 ABS가 작동한다. 핸들을 틀어 범퍼와 부딪히는 추돌을 피했다. 동시에 클락션 소리가 들린다. 옆차선으로 끼어드는 움직임으로 간주한 차량이 경고 메세지를 보냈다. 오른 다리가 뻐근하다. 핸들을 트는 동작에서 기체 밖 발판에 정강이 뼈가 부딪힌 모양이다. 보호대없이 카프킥을 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해변에 누워 쉬고싶다.

'고작 3천 얼마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구나.'

차선 변경 후 사이드 미러를 보았다. 뒤 차량은 멀찌감치 간격을 두고 방어 운전을 하고 있다. 주문 알람은 수락하지 않았다. 픽업지가 멀어 조리완료 시간 내에 이동하지 못할 듯 싶었다. 어쩌면 아이들 하원 시간에 맞춰 어린이집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의 순간이었다.

해변 대신 침대에 누워 상황을 복기했다. 오른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아기새들이 어린이집에서 등원 시간 신발을 벗으며 일찍 데리러 와달라 부탁했는데 아빠새는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12시에서 13시 30분 사이 아이들 등원 후 1~2시간 음식 배달을 하고 있다. 어린이집 하원, 저녁 식사 준비, 아이들 샤워를 끝내면 아내가 직장에서 돌아온다. 아내와 바통터치를 하고 저녁 배달을 하러 다시 집을 나선다. 낮에 위험했던 상황을 머릿 속에 저장하고 천천히 스로틀을 당긴다. 겁이 많은 이들이 생존에 유리하다. 자정 무렵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바라본 천장은 검은 하늘이 아니었다. 아직 아이들을 다 키우지 못했다. 겹친 숫자가 없는 복권처럼 번호표를 찢어 버렸다.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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