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원 Jan 10. 2022

뜨개질 추억

뜨개질 추억

뜨개질 추억

손 원


어릴 때 어머니 반짇고리에는 항상 축구공 만한 털실 두 개가 담겨 있었다. 그 털실로 어머니는 수시로 뜨개질을 하셨다. 겨울이면 들에 갈 일이 없기에 어머니는 방 안에서 반짇고리를 내려놓고 밤낮으로 뜨개질을 하셨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두툼한 스웨터로 추운 겨울을 따뜻이 보낼 수가 있었다.


털실로 짠 수제 스웨트는 무척 따뜻했다. 당시 누구나 뜨개질로 가족의 스웨트를 마련했다. 뜨개질은 어머니들의 평범한 일상이었고 가끔 남자들도 거드는 만큼 뜨개질은 유행이었다. 스웨트일 경우, 맨 처음 시작단계는 굴렁쇠처럼 원을 만들고 그위로 한 줄 한 줄 채워 올렸다. 두 세줄 손마디만큼 올라오면 누구 옷을 뜨개질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아버님 스웨트라면 지름이 두 뼘, 내 것은 조금 적었고, 다섯 살 동생 거라면 지름이 한 뼘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일주일쯤 지나면 목 부분까지 차오르고, 두 소매를 하여 마무리를 하셨다.


옷이 귀했던 시절 어머니는 자신의 수고로 가족들 스웨트를 만드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셨다. 평소에 여기저기서 실타래를 구해 스웨터 한 벌이 되기까지 모으셨다. 수시로 모은 털실이기에 굵기와 색깔도 다양했지만 어머니는 조화롭게 구성하여 멋진 스웨터를 만드셨다. 낡은 스웨트는 실을 풀어 원구형으로 감아 두셨다가 재활용을 거듭하셨다. 털 목도리가 낡으면 풀어 털모자나 장갑을 만들기도 했다. 가끔 새 털실도 썼지만 헌 털실을 보태어 스웨트를 짜면 몇 년은 무난히 입을 수가 있었다. 재활용 털실로 짠 스웨트는 다소 후줄그레 하고 안 쪽은 매듭 투성이로 거칠고 두툼하기까지 했다. 요즘의 얇고 따뜻한 스웨트와는 사뭇 달랐지만 당시로는 그것도 훌륭했다.


당시 대도시에서 이모가 살고 계셨다. 이모가 어머니께 선물한  분홍색 목도리가 있었다. 두툼하고 커서 추운 날 온몸을 휘감을 정도로 넉넉했다. 한 동안 잘 이용하셨는데 어머니는 어느 날 그 목도리를 풀어 공처럼 감으셨다. 여섯 살 여동생 스웨트를 짠다고 하셨다. 굵은 울을 촘촘히 짠 털 스웨트는 두툼하고 따뜻하여 몇 년간 여동생 둘이 즐겨 입었던 기억이 난다.


양모가 귀했던 시절에 옷 한 벌 사 입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비교적 저렴했던 털실을 사다가 옷이며 장갑 등 소품은 뜨개질을 해서 만들었다. 수공이 많이 든 뜨개질 소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손수 뜨개질한 외투나 장갑은 젊은이들에게도 손색없는 선물이었다. 어머니의 뜨개질 솜씨를 딸이 전수받아 소품을 만들었기에 적은 비용으로 따뜻함을 전할 수가 있었다. 중학교 기술이나 가사 과목에 뜨개질이 나오기도 했다. 남자로서는 흥미가 없어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시험을 대비해서 간단한 방법과 유형 정도는 숙지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코도 뜨개질한 적이 없다. 위로 누나가 없었기에 뜨개질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기계문명 시대에 의복을 비롯한 소품을 뜨개질로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맞춤식 털실과 각종 도구를 구입하다 보면 비용도 만만치 않아 비경제적일 수도 있다. 그럴수록 뜨개질 제품은 더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직접 정성을 들여 만든 수제품은 만든 이의 혼신의 노력과 정성이 베여 있어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제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세계적 명품 브랜드인 아르메스, 구찌, 루이뷔통이 세상을 점령하고 있고 누구나 이들 제품을 하나쯤 갖고 싶어 한다. 수공예품인 페르시아 양탄자가 명품이 듯 우리의 뜨개질 문화가 잘 정착이 되면 누구나 명품을 탄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할머니가 뜨개질 한 투박스러운 가방이 가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지금 뜨개질은 취미로 명맥을 잇고 있을 정도다. 치매예방을 위하여도 뜨개질이 권장되어야 할 만한데도 그렇지 못해 아쉽다.

모든 것이 편의주의고 경제적으로만 생각하는 시대다. 미풍양속을 전승하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전통을 대신할 만한 좋은 방법이 있다면 모르겠으나 어떠한 방법도 어머니의 손맛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도 분명하 다. 장맛이 그렇고 뜨개질한 목도리가 그렇다. 내 어릴 때 한복과 양복이 절반 씩 공존 한 때가 있었다.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양복보다 한복이 훨씬 편하다고 하셨다. 50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천편일률적으로 서양식 의복으로 변해버렸다. 그러기보다 우리 것을 살린 다양성 있는 변화가 아쉽다.


한복의 대중화를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도 필요하다. 옷감이나 모양도 보다 다양하게 하여 생활한복으로 무난히 입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양모를 사용하고 가죽 허리끈을 사용하고 옷에 착 달라 붇는 한복 등 다양한 한복으로 개발된다면 세계적인 패션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털실을 재료로 한 수제품이 생활 속 깊이 스며들어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뜨개질 문화가 나눔과 사랑의 실천 수단으로 정착되면 좋겠다. (2022. 1. 10.)

작가의 이전글 기념 타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