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가김 May 25. 2023

명품백 구매하기 그리고 실패하기

그리고 무엇이 남았지?


  나의 첫 번째 명품백은 23년 전 삼성동 큰어머니가 대학 졸업 선물로 사 주신 P사의 토트백이었다. 그 시절 P 브랜드 특유의 블랙 나일론 원단 가방이 큰 인기였는데 그 시리즈의 신제품이었다. 큰어머니는 나에게 그 가방을 선물해 주신 것으로써 나에게만큼은 평생 어른의 역할을 다해 주신 거나 다름이 없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입든 이 가방만 메면 그만이었다. 나는 졸업 후 회사면접을 보러 갈 때도 항상 같은 블랙 원피스를 입고 이 토트백을 들었는데, 쓰임새 좋은 이 가방이 나의 첫 직장 입사면접 때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고 며칠 지났을 무렵 내 면접을 봤던 팀장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 면접 날 하고 온 거 보니까 되게 부잣집 딸내미처럼 보이더라? 그래서 너 뽑았던 건데……"

아, 그랬구나. 가방 앞면에 단단히 박혀 있는 브랜드 로고, ‘삼각형을 거꾸로 세우고 그 안에 줄 맞춰 놓은 5개의 알파벳’이 면접일에 내가 고심하며 뱉은 그 어떤 문장들보다 힘이 셌구나. A4지 정도 크기의 이 가방 안으로 삼성동 큰아버지댁 반지하에서부터 서울의 북쪽 경계선 아파트 5층으로 올라오기까지 안간힘을 쓴 4인 가족의 길고 긴 히스토리가 다 숨겨졌다. 그러므로 나는 바닥면 모서리 원단이 다 닳도록 이 가방을 멨다.



  두 번째 명품백은 B사의 숄더백이었다. 27살 때 미국으로 첫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 면세점에서 산 가방이다. 내가 부잣집 딸내미인 줄 알았다는 팀장님이 회사에 사표를 내고 뉴욕으로 유학을 갔고 다음 해 여름 “숙소 걱정 없이 놀러 오라”며 나를 초대해 주셨다. 내가 팀장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수준의 부잣집 딸내미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몇 개 정도의 사회적 층계를 뛰어넘는 우정을 만들었다. 비자를 받고 항공권을 구매하자마자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서울 시내에서 가장 큰 면세점에 갔다. 해외여행에 있어서 면세점을 들르는 것은 현대인들의 풍속이자 각오가 아니겠는가. 근사한 백 하나를 틀림없이 사야 했다. 몇 시간의 장고 끝에 가방 하나를 골랐다. B사의 서명이라 할 체크무늬가 반듯하게 인쇄된 아이보리색 몸판에 빨간색 에나멜가죽 뚜껑이 있는 가방이었다. 가격은 50만 원이 채 안 되었는데 나는 3개월 할부로 샀다. 그리고 카드값이 다 나가기도 전에 나는 그 가방을 친구 결혼식장에서 도둑맞았다. 가방을 자리에 둔 채로 단체사진을 찍으러 단상으로 나간 사이에 사라져 버린 거다. 그때 가방끈을 쥐고 쉽사리 놓지 못하던 나에게 “가방을 두고 나가도 된다” 말해 놓고, 막상 가방이 없어지자 나의 곤경을 모른 척 한 그 친구에 대한 원한이 아직 깊다.



  그리고 어제 새벽에 결제한 세 개의 가방이 이제 나의 세 번째 명품백’들’이 될 터였다.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라고? 그렇다. 50% 이상 세일하는 가방들만 골랐으니까 나는 가방 한 개 값으로 세 개를 사는 셈이었다. 이 유명 해외 패션사이트에서, 이 가방들을 아직도 안 사고 있는, 이 세상 다른 사람들이 어쩐지 의아하기만 했다. 가방을 사는 게 돈을 버는 거였다. 이토록 분별 있고 현명한 내가 사야지 별 수 있나? 결제까지 마치고 한숨 자고 일어나서 사이트 결제목록에서 보이는 가방들의 상세 이미지들을 다시 확인했다. 이미 백 번은 본 것 같지만 또 클릭해 본다. 그런데 왜 지금은 다시 보니 세일 가격이야말로 적정가인 듯 하지? 지난밤 나는 내 인생의 세 번째 명품백을 가져야겠다 결심하자마자 네 시간 만에 실천했다. 새벽을 꼬박 새우며 사이트 속 가방 카테고리를 다 뒤져서 장바구니에 가방들을 넣고 빼고 했던 부지런하고 또 대범했던 한 여자가 왜 지금은 낭패감을 느끼는 걸까?



  늦은 점심을 먹고 한 네 시간쯤 지났을 무렵에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가방을 사느라 단번에 300만 원을 썼다는 내 행동의 무게는 처음에는 짊어질 만하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300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내 머릿속에서 계속 모양을 바꿨다. 3개의 가방은 부모님을 모시고 떠날 수 있는 유럽행 비행기 티켓으로 변했다가, 구부정한 목과 어깨의 방향을 바꾸고도 남을 50회의 PT수업으로 변했다가 1년 치 영어 과외비로 변해 있었다. 1년 동안 과외를 받은 후 나는 분명 네이티브 수준의 발음을 구사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300만 원의 돈이 변신을 거듭하다 사무실 임대료 3개월치의 모양이 되었을 때, 이 계약을 파기해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나는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자영업자로서의 직업윤리를 배반한 것이었다. 핸드폰을 쥐고 사이트의 결제 페이지로 신속하게 들어갔다. 아! 아까까지만 해도 활성화되어 있었던 ‘return’ 버튼에 클릭이 안 되었다. ‘이런, 젠장.’ 이제는 남편에게 털어놓아야 했다.


“여보 미안해. 나 일을 저질렀어.”






  토요일 새벽에 온라인으로 결제한 가방들은 수요일 낮에 우리 집 대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캐나다 패션 회사가 발사한 로켓배송이었다.


  영어로 가득한 DHL 송장이 붙여진 커다란 크라프트 박스에서 세 개의 가방들을 차례차례 꺼냈다. 가방 모양을 유지해 주도록 안쪽에 구겨져 넣어져 있던 종이들을 조심스레 꺼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어깨 끈을 감싸고 있는 반투명한 얇은 종이였다. 조금이라도 찢어지면 안 되었기에 문화재 관리청의 연구원처럼 조심조심 포장지를 벗기고는 가방의 세부 사항들을 살폈다. 가방 앞면 하단에 박혀 있는 로고들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어떤 것은 알파벳 모양의 메탈 장식으로, 어떤 것은 금박 인쇄로, 어떤 것은 레이저 각인으로 호명되고 있었다. 각각의 이름들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이국적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로고들은 납작한 그래픽들이 아니었다. 자기만의 질감과 양감을 지니고 있었다. 스트랩의 버클마다 브랜드 이름들이 조그맣게 새겨져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3개 모두 ‘명품백’이 맞았다.



  어? 그런데 가방 하나의 가죽 면에 상처가 있다? 게다가 상처가 두 개네? 몸판에 하나, 손잡이에 하나. 원래 같았으면 고심해서 구매한 제품에 하자가 있음에 화가 나야 마땅하겠지만, 나는 어쩐지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환희였다. 핸드폰으로 이 스크래치들을 다각도로 여러 번 사진을 찍었다. 1mm도 채 되지 않은 작은 크기의 흠집들이었으므로 누군가에게는 먼지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그러고는 이 세 개의 가방을 박스 안으로, 비닐 봉투 안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다음 날, 구매한 사이트에 도착한 제품 중 하나에 하자가 있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썼다. 첨부한 사진은 총 9장이었다. 4일 후에 답신이 왔다. 하자가 있는 제품이 맞으니 이 제품을 그냥 사용할 거라면 수선비 명목으로 30불의 부분 환불을 해주고, 반품하고 싶다면 무료 반품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나는 즉각적으로 회신을 보냈다. ‘혹시 하자가 없는 다른 제품들도 같이 반품한다면 반품비가 어떻게 될까요?’ 이번에는 곧장 답변이 왔다.



단순 변심으로 반품하고자 하는 제품들도
하자 있는 제품과 함께 무료로 반품할 수 있습니다.



  이 캐나다 회사의 너그러운 답변에 나는 오히려 우왕좌왕했다. ‘이 중 적어도 하나의 가방 정도는 그냥 써도 되지 않을까?’라는 흉악한 생각이 들었다. 가방 하나의 가격이 대략 100만 원인 셈이므로 만약 하나를 남겨야 한다면 이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 또한 애초에 쉽게 결정될 일이 아니었다. 박스 속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가방들은 내 것도, 캐나다 패션 회사의 것도 아니었다. 세 개의 가방은 커다란 크라프트 박스 안에서 조용히 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변이 60cm 정도의 정육면체 박스의 연옥을 집 안에 구축한 지 며칠이 지났을 무렵 오래된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대학원에서 목회 상담학을 공부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전문적으로 배워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잘 돕고 싶어.”, “될지는 모르겠지만 훌륭한 치료자가 되고 싶어.” 그는 좋은 사람이다. 응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의 근황을 고려하면 경제적으로 빠듯한 사정일 터였다. 한 학기에 500만 원이 넘는 학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물어본 것에 대해서는 왠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았다. 불과 10일 전에 가방을 사겠다고 300만 원을 써 버린 나였다.



  또 다른 한 주가 지난 후에야 나는 캐나다 패션사이트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3개 제품 모두 반품하겠습니다.”


가방 카드값은 이미 진작에 통장에서 빠져나간 후였다.



  다음날 DHL 직원에게 가방 3개가 담긴 박스를 통째로 넘기고 나서야 내 영혼에 평화가 깃들었다. 물건을 사는 데에 300만 원이라는 돈을 한 번에 쓴다는 건 아직 내 깜냥이 아니었음을 절감했다. 내 인생의 세 번째 명품백은 아직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맞았다. 가방을 보낸 지 열흘쯤 지났을 때 반품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그리고 내가 명품백을 사고 마음고생을 한 적이나 있었던가 싶을 때쯤 계좌에 환불 금액이 입금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오, 돈이 한화로 곧장 들어왔네?’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금액의 사이즈가 시각적으로 좀 달라 보였다. 바로 메일함을 뒤져서 지난달 카드 명세서를 확인했다. 확연히 달랐다. 내가 최초에 결제했던 금액보다 14만 원이 넘는 돈이 더 들어온 것이다. 캐나다회사에 한국까지 제품을 보내고 또 받는 일의 품을 들게 하는 가운데 환율이 오른 거다. 오히려 내가 환차익을 보다니. 나에게 총 다섯 번의 메일을 보내준 캐나다 회사 담당자에도, 친절하기 그지없었던 DHL 직원에도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별다른 노동 없이 14만 원을 벌었다는 쾌감은 대단했다. 톡 쏘는 짜릿함에 겸연쩍은 마음은 금방 흩어졌다. 친구의 등록금 또한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