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에 쓴 글
6개월 전만 해도 우리는 우리를 몰랐다.
작년 7월 초쯤, 아빠가 지인의 부고를 듣고 고향에 다녀오셨는데 갑자기 오촌조카 이야기를 꺼내셨다.
"서영이가 말이다, 이번에 네 막내고모집 들려서 처음 봤는데 애가 참 괜찮아 보이더라."
"네? 서영이요? 걔가 누구죠?"
"막내고모 첫째 딸, 은경 언니 알지? 그 언니 딸이야."
그렇게 알게 된 나의 오촌조카. 그전까지 나에게 조카란 남동생 부부가 낳은 귀염둥이 셋 뿐이었는데 갑자기 내 인생에 네 번째 조카가 등장했다. 오촌이라는 관계의 수를 아빠와 앉아서 따져보았다. 나의 막내 고모의 딸인 은경 언니가 나와 사촌이니 그 언니가 낳은 서영이가 나의 오촌조카가 된다는 거다. 오촌이란 '나의 부모의 형제의 자녀의 자녀'라는 '의'가 5번 거듭되는 혈통의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관계로다!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간의 우리 사이가 납득이 되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며칠 후 아빠에게 서영이의 연락처를 묻는데 아빠는 신이 나 있었다. 딸이 막내 동생의 손녀를 챙기는 모습이 뿌듯하셨을까. 우리의 관계가 아리송하긴 해도 그녀는 신촌에 살고 나는 합정에 사는데 한 번 만나지 않을 이유가 있나?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어른다운 척하기 가장 좋은 제안을 건넸다.
"우리 동네로 오면 맛있는 거 사 줄게요!"
아직은 존댓말로. 그때는 그게 편했다.
우리는 통화 후 그다음 주 목요일에 만났다. 서영이가 당시 하고 있었던 파리바게뜨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합정동까지 올 수 있는 시간이 저녁 6시 반이란다. 근처에서 제일 유명한 일식 우동집에서 그 시각에 만나기로 한 것은 현명한 일은 아니었다. 식당 앞에서 우리 차례가 되기까지 40분을 보내야 했다. 오촌조카를 처음 만나고 이야기하는 이 시간이 어찌나 어색하고 긴장이 되던지 한 여름 길 복판에서 40분간 서 있는 피로함조차 없었다. 그저 빨리 우리 앞에 음식이 놓이기만을 고대했을 뿐. 그런데 우리의 어설펐던 40분간의 대화보다도 식당 안에서 마스크를 벗은 그녀의 얼굴이 나에게는 훨씬 더 낯설었다. 아, 20대 초반의 얼굴은 이런 거구나. 내가 상상해 온 20대 초반의 얼굴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말갛고 주먹만 한 작은 얼굴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아이들이 '뉴진스' 하는 거잖아? MZ 세대의 대표 얼굴이라 소개해도 될 만한 사람이 내 앞에서 열심히 냉우동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3주 후 서영이는 우리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그녀가 내년 봄, 4학년으로 복학하기 전까지 같이 일하기로 했다. 뭐든 해보겠다는 기세 좋은 아이와 많은 일을 해내고 싶었다. 그리고 어쩐지 아빠에게 효도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반은 패기로 반은 효심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6개월 후는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었는데.
몇 달을 같이 일 해보니 그녀는 나와 정말 다른 사람이다. 당연하게도.
우리 사이의 가장 현격한 다름을 느낀 순간은 사실 그녀가 카톡 문자로 자신의 이름을 노란색 풍선 안에 넣어 보내줬을 때였다. 어? 나와 성이 다르네? 나에게 조카란 모름지기 김 씨여야 했다. 세 명의 조카들은 나와 성이 같다. 그런데 그녀는 장 씨다? 아하, 성이 달라도 나의 조카가 될 수 있는 거구나. 그래,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은 가부장 관습적 기호일 뿐이야. 친족의 관계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아.
우리의 다름은 성性뿐이 아니다. 그녀는 나와 스무 살이 넘게 차이 난다. 겹띠동갑이 될 뻔했는데 아슬아슬하게 면했다. 하핫. 어쩌면 우리의 나이 차이가 우리의 다름을 설명하는 가장 적당한 이유일지 모른다. 예를 들어 그녀는 커피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 시절 나도 그랬다. 쓴 커피가 왜 필요한지 몰랐다. 30대 중반부터야 커피를 홀짝이다 현재의 카페인 중독 상태가 되어버렸다. 20년이 지나면 입맛도 습관도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것이기를. 당연하게도, 우리의 멜론 플레이리스트도 완벽히 다르다. 며칠간은 서로의 플레이리스트로 음악을 틀어놓고 일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잘 틀지 않는다. 이것은 서로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는 일.
또 다른 점으로, 우리는 서로가 나고 자란 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른다는 거다. 나는 평생을 서울에서만 살았고, 그녀는 스무 살 전까지 따뜻한 남쪽지역에서만 살았다. 그녀는 내가 학교를 다닐 무렵부터 결혼 전까지 살던 서울의 북동쪽 동네의 이름들이 지닌 함의를 아직 잘 모른다. 나는 삼천포와 사천이 통합됐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녀는 이토록 추운 서울의 겨울이 아직 낯설다. 서울 올라오기 전까지 눈 내리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와서 매일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를 듣는 것도 낯설었단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아는 사람도, 나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도 별로 없는 서울의 익명의 삶이 주는 편리함을 그녀도 곧 배울 거다. 서울에서는 사이렌 소리의 출처를 알 도리도, 알 필요도 없다.
물론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구석도 있다. 오촌 간에는 6.2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는데, 우리도 딱 그 정도가 비슷한 걸까. 우리 둘 다 쫄깃한 젤리를 좋아하고, 동그란 '찹쌀전병'보다는 길쭉한 '찹쌀'선과'를 좋아한다. 그리고 파랗게 질려 있는 설익은 바나나가 좋다. 성격으로 넘어가 볼까. 나는 서영이가 좀 무심한 편이라는 걸 알았다. 내 주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든, 주위 사람이나 주위 환경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무감한 사람. 쉽사리 외롭지 않은 사람. 나는 알 수가 있었다. 이 아이도 나 같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우리는 서로의 MBTI를 물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좋아한다. 책 읽는 것 자체가 희귀한 시대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물론 내가 20대 초반에 도서관을 외계로 여기고 천둥벌거숭이처럼 살았던 것에 비교하자면 이미 책과 가깝기로 결정한 그녀는 훨씬 자주적이고 씩씩한 정신의 소유자다. 내가 그녀보다 20년을 넘게 더 살았으니 꽤나 의젓한 어른인 척도 하고 싶지만 그녀도 이제는 눈치챘을 거다. 내가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어른인지를.
무엇보다, 우리는 둘 다 디자인을 배웠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이름만 번지르르한 공부를 선택하게 된 걸까. 디자인을 배우면 거기에 뭐라도 있을 줄 알았던 우리들은 어리석었다. 이 어리석음이 우리 사이의 최대공약수다. 그런 둘이 함께 발버둥을 쳐보기로 했다. 함께 도모해 보면 디자이너로서의 우리의 행방에 조금이나마 윤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아냐, 그녀의 미래가 나처럼 척박할 거라 미리 결론 내지는 말자. 나는 그저 이 젊은 청년과 재미있는 걸 해 보고 싶어서 '오촌지간' 프로젝트를 해보자 했다. 우리들이 배운 '디자인'이라는 지식과 기술로 이윤이나 책임을 계산하지 않고 재미만을 도모하는 이기를 부리면 안 될까 해서 말이다.
그녀의 핸드폰에 나는 '서울 이모'로 저장되어 있다. 그래, 모름지기 이모에게 이름이란 필요 없는 법. 게다가 그녀에게 '서울 이모'는 나 하나니까. 그래도 서영이가 20년쯤 후, 40대의 인생을 구불구불 펼치고 있을 때쯤에는 기어코 내 이름을 잊어버리고 말았을까 봐 조금 겁이 난다. 우리는 오촌지간이라는 알쏭달쏭한 이 거리를 계속 지켜낼 수 있을까. 오촌조카의 핸드폰에서 내 이름 '김경아'로는 영원히 검색되지 않을 나는 그렇게 있을 법한 미래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PS. 아니? 나는 여태껏 서영이한테 고모인 줄 알았는데, 내가 이모란다? 위에 서영이가 핸드폰에 저장해 두었다는 내 이름도 '서울 고모'라 기억하고 있었는데, 서영이가 알려준 지금에서야 이 글의 모든 '고모'를 '이모'로 고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