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와 독서로 하루가 지나는지 알았다
농담으로 하는 것 같아도 선배님 시절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말은 틀리지 않는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퇴직 후 낚시에 집중하고 있고 한편으로 그간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 얼굴 보느라 꽤나 바빴다. 직장 다닐 때는 모든 약속이 저녁시간이었으나 이제는 상대방도 백수니 점심약속이 편리하다. 직장인 점심시간을 피해 13시에 만나면 러시아워도 피할 수 있으며 유명 음식점도 한가해 예약도 필요 없다. 소문난 맛집이라도 줄 서서 기다리면 가지 않았으나 요즈음에는 소문난 맛집 가는 재미도 있다.
미뤄두었던 일들도 처리했다. 은행업무나 세금업무는 온라인으로 가능하나 자동차 리콜, 세탁기 수리, 에어컨 청소..., 물론 직접 하는 것이 아니어도 시간이 필요하고 신경 써야 하는 일이며 퇴직하면 하려고 미루고 묵혀두었던 일들도 있다.
첫 번째 퇴직 후에는 나태해질까 봐 하루시간표를 작성해서 빡빡하게 생활했었다. 하지만 두 번째 퇴직 후에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 시간표를 작성하지 않았다. 또한 일이 밀리고 쌓인 꼴을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나 해야 할 일이 많아도 하루 한 가지 일만 하기로 했다.
퇴직 전처럼 다이어리에 계획을 적는다. 예전에는 많은 약속을 효율적으로 소화하기 위해 시간단위로 관리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단위 계획만 관리해도 충분하다. 그것도 중간에 비는 날이 많고 혹시 급작스럽게 낚시 갈 일이 생기면 계획된 일을 미뤄도 무방하다. 시장보기, 창고정리 등은 늦추거나 취소해도 전혀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일들이다.
해가 바뀌고 3번째 직업인 손녀돌보기가 시작되니 바쁜 백수가 되었다. 자유롭기는 하지만 그리 느슨한 삶을 살고 있지는 못하다. 우선 하루 일과부터 만만치 않게 빡빡하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먹고 돌아서면 밥 준비를 해야 한다.
종합편성채널 TV에 ‘삼시 세끼’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차승원, 유해진 씨가 게스트와 함께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삼시 세끼’ 해 먹는 내용이다. 부식을 바다 또는 들에서 구해 요리하는 것으로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아침 먹고 돌아서면 점심 준비, 먹고 돌아서면 저녁준비, 세끼 먹으면 바쁜 하루가 지나가네.’ 했었는데 요즈음 내 모습과 흡사하다. 건강을 위해 집밥 위주로 식사하다 보니 날마다 ‘삼시 세끼’다.
나이 들어 아침잠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수십 년간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4시에서 4시 30분 사이에 기상한다. 7시 30분까지 책을 읽기도 하고 끄적거리기도 한다. 아침준비는 간단하다. coffee 내리고 과일 깎고 빵이나 샐러드 삶은 계란 등으로 간단하게 식사한다.
손녀를 돌보는 날에는 점심식사 후 도서관을 가고 주변을 산책한다. 산책길에 있는 마트에 들러 식재료를 구입해 저녁준비를 하고 손녀를 픽업한다. 손녀는 이제 행동반경이 넓어져 시선에서도 곧잘 사라진다. 이럴 때 조심해야 한다.
손녀 돌보기에서 휴가를 얻는 날은 아내와 놀러 가거나 집안 정리를 하는 날이다. 아내가 그만 따라다니라고 할 때까지 붙어다니기로 했다. 물론 틈틈이 지인도 만나고 낚시도 간다.
집안정리는 놀멍쉬멍하기로 했다. 버리고 정리하려면 갈 길이 멀다. 큰아이는 결혼한 지 오래고 작은아이도 외국생활한 지 오래나 아직도 정리하지 않은 본인 짐들을 많다. 지방 생활하고 올라온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더부살이하듯 하고 있다. 방 정리하고 미니멀라이프로 살고 싶다는 아내 바람이 이루어지려면 상당기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
구축아파트이며 인테리어 공사한 지 오래되어 집안 정리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큰 것이 끝나면 작은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작은 것도 끝나면 미세한 부분이 보인다. 피아노, 장식장, 서랍장을 버리고 창고에 있는 잡다한 물건, 유행 지난 옷과 신발을 버렸다. 인덕션레인지를 설치하고 건조기를 세탁기 위로 올렸더니 새로운 공간이 많이 생겼다.
큰 일했다 싶었는데 중간 일이 남았다. 천장등이 너무 밝다고 하여 등기구를 교체하고 노후된 콘센트도 갈았다. 군데군데 벗겨진 원목마루에 바니쉬도 칠했다. 욕실출입문이 물에 불어 들떴기에 시트지를 붙이고 라디에이터 도색도 했다.
중간일이 마무리되어가자 천장 도배지가 조금 찢어진 것도 보이고 주방 싱크대 문짝에 미세한 단차가 생겨 수평을 맞지 않는 것도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퇴직 전에도 분명 보였을 텐데 손가락 꼼짝하지 않다가 이제야 하나씩 해결하고 있다.
미세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그렇다고 서두르지는 않는다. 일하는 재미도 있고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묘한 성취감도 얻을 수 있다. 재료를 고르고 사는 재미도 있으며 고치고 해결하는 과정도 재미있다. 물론 시간투자도 해야 하며 전문가가 시공했을 때보다 품질은 떨어진다.
이제는 시간도 잘 흐르고 시간표 없이도 백수 생활이 규칙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사실 속으로는 백수가 이렇게 바쁜지 몰랐기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백수가 되면 이리 빈둥 저리 빈둥거리며 낚시와 독서로 하루가 지나는지 알았다. 본인이 먹는 ‘삼시 세끼’ 해 먹는 것도 이렇게 일거리가 많은데 아내는 이렇게 많은 일들을 어떻게 혼자 처리했는지 궁금하다.
백수라고 전혀 소득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 버는 일도 한다. 5월은 종합소득세를 납부하는 달, 홈택스에 로그인하면 자동으로 세금을 계산해 준다고 한다. 하지만 유튜브를 보니 오류로 인해 과한 세금을 납부하는 경우가 많단다. 시간이 남으니 유튜브를 몇 편 본 후 유료 세무서비스를 이용했다. 백수 전에는 유튜브 시청시간도 부족하고 정부가 부당 징수하겠나 싶어 홈택스 산출금액을 성실 납부했으나 백수가 된 후 시간이 많으니 꼼꼼하게 따져 마침내 절세했다. 稅(세) tech로 소득이 생겼으니 또 소득세를 내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