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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 두 가지

행복 기준을 만들어 잣대를 들이대어 자신을 맞추려 하니 어려워진 것이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알고 있는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은 단 두 가지다. 행복에 대한 기준을 낮추는 방법과 또 하나는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행복해지는 방법과 행복의 기준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과장해서 말하면 2025년 8월 기준으로 지구상에는 82.4억 개로 세계 인구수와 같은 방법과 기준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매한 나는 두 가지 방법밖에 모른다.

두 가지 방법은 크게 볼 때 한 가지와 같다. 남들과 비교하기에 행복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며, 행복의 기준을 낮추려 해도 타인의 눈초리를 의식해야 하기에 쉽지 않다. 맞다, 행복에는 기준이 없는데 기준을 만들어 잣대를 들이대어 자신을 맞추려 하니 어려워진 것이다.

행복은 구체적 형태가 없는 개념이다. 문법에서도 ‘사랑’, ‘꿈’과 같이 추상명사, 불가산명사로 취급된다. 추상명사와 불가산명사에 기준이란 것이 존재할까?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오늘 제목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 두 가지’는 문법은 맞을지 몰라도 잘못된 표현이다. 수십억 개의 수많은 방법 중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물질적이며 유형의 것을 기준으로 잣대를 설정했기에 붙인 제목이다.


기준은 물건을 제작하고 사회를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한 인위적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인간이 만들어낸 기준에 의해 인간이 울고 웃고 행복과 불행을 재단하는 것이니 자기 발목을 잡은 형상이다.

행복은 가치관의 문제이며 주관적이기에 81.2억 개의 방법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는 달리 표현하면 기준이란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기준을 종종 잊는다. 그리고 타인이 만든 기준을 추종하려 무진 애를 쓴다. 행복해지기 위해 고통을 참고 인내하여 기준을 맞췄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려 할 때 찾아올 줄 알았던 행복은 다시 멀어져 있다. 기준이 높아졌거나 바뀐 것이다. 타인이 더 행복해 보인다는 주관적 시각이 객관의 기준을 덮어버린 것이다.


기준에 대한 논란은 기원전부터 있었다. 莊子(장자) 人間世(인간세)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 ‘無用之用(무용지용)’도 유사한 이야기다. 장석이 제나라로 가던 중 토신묘의 참나무를 보았다. 크기가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만했고 둘레는 백 아름을 넘었다. 배를 만들 만한 가지도 여럿 되었다. 구경꾼들은 구름처럼 모여 있었으나 장석은 거들떠보지 않고 가던 길을 갔다.

장석의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 이처럼 훌륭한 재목을 본 적 없는데 어찌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까?’ 장석이 말했다. ‘그것은 쓸데없는 나무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썩으며 그릇을 만들면 깨진다. 문짝을 만들면 송진이 흐르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먹어 재목이 될만한 나무가 아니다. 쓸만하지 않으니 오래 사는 것이야.’

장석이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는데 참나무가 꿈에 나타났다. ‘그대는 나를 어디에 견주는가? 과일나무는 과일이 익으면 따게 되고, 딸 때 가지가 찢기고 휘어지는 수모를 당한다. 이들은 자기 능력으로 자기 삶을 괴롭히는 것들로 타고난 목숨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 어떤 물건이든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 곳이 없기를 바란 지 오래되어 죽을 뻔하다가 이제 야 뜻대로 쓸모없음이 내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 있었다면 어찌 이처럼 커질 수 있었겠는가?’.


목수의 시선(기준)으로 보면 참나무는 배, 관, 그릇, 문짝, 기둥의 쓸모를 찾지 못해 쳐다보지 않는 나무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쉬려는 사람들과 소의 기준은 달랐다. 더운 날에는 서늘하고 커다란 그늘을 제공해 주는 나무가 가장 쓸모 있는 나무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무 자신의 기준이었다. 참나무는 과일나무처럼 가지가 찢기고 휘어지는 수모를 당하기 싫었다. 살아남기 위해 쓸모없도록 부단히 노력한 결과 배, 관, 그릇, 문짝, 기둥으로 쓰지 못하도록 진화했다. 자연에서는 최고의 善(선)이 오래도록 살아남는 것이니 쓸모없음을 가장 커다란 쓸모로 만든 것이다. 새로운 기준을 만든 것이다.


기준은 변한다. 시간에 따라 변하고 사회환경과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서도 변한다. 요즈음 젊은 세대 가치관은 잘 모르겠지만,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대를 살았던 베이비부머들 가치관은 단순했다. 성공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 돈 많이 벌면 평수 넓은 주택에 살며, 번쩍이는 대형차를 몰고, 갈비같이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이 행복이었다. 부모와 자녀들까지 덩달아 우쭐해지는 것이 사회적 성공이자 행복의 기준이며 척도였다.

베이비부머들의 가치관과 행복에 대한 기준은 매우 단순하고 물질적이다. 어쩌면 자본주의와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기준일수도 있다. 아니 자본주의 탄생이전에도 배불리 먹고 호화롭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했으니 자본주의는 기준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자동차 렉스턴 광고카피는 ‘대한민국 1%’였으며, 그랜저 광고카피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였다. 1등 지향이며 출세지향적 사고를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광고카피다. 광고가 유명해지고 차량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가치판단 기준이 강제로 의식화되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먹고 입고 자는 것에까지 적용된다. 아파트천국 한국에는 유럽보다 많은 ‘palace'가 있으며 사과, 배, 떡, 생선에는 하나하나에 ’ 명품‘이란 포장과 스티커가 붙어 있다. 손에는 아이폰이 들려있으며 명품이 아니라도 100만 원 넘는 패딩을 입고 다녀야 동년배들과 어울릴 수 있다. 재물의 가격과 유무가 貴賤(귀천)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며,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당연한 현상인지 모른다.

베이비부머들의 가치관이 배금주의에 물들어 통속적이며 천박하다고 씹어대던 신세대들의 행복이란 것도 어쩌면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호화롭게 살거나 *플렉스 하는 것을 싸잡아 비난할 수 없다.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이며, 공정한 대가를 정의롭게 사용한다면 통속과 천박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시빗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은 뻔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늘어놓았다.


* 플렉스: 팔 근육을 구부려 힘을 과시한다는 어원에서 출발,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시하는 것을 뜻하는 유행어. 나아가 명품이나 귀중품을 구입하여 과시하는 현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부리다’라는 영어의 어원(flex)에서 비롯된 말로 1990년대 미국의 래퍼들을 통해 자신을 지나치게 과시한다는 뜻이 파생되었으며, 2010년대 이후에는 재물이나 명품을 과시한다는 의미가 추가되면서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2019년을 전후해 래퍼를 통해 도입, 과시적 소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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