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고 쓰기

1107. 동양 철학 에세이 2권 (2)

김교빈著, 동녘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북송오자: 성리학을 일궈낸 북송의 철인들

현대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통 철학은 조선의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이다. 조선의 유학은 성리학이며 공맹철학의 진수였다. 유학을 굳이 성리학으로 부르는 이유는 유학을 새로운 사유구조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사실 성리학대신 주자학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사용되었는데 주희가 성리학을 완성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희에 앞서 성리학의 토대를 다진 사상가들이 있었는데 주돈이를 비롯해 북송시대를 살아간 다섯 명의 철학자들로 이들을 北宋五子(북송오자)라고 부른다.

송나라는 당나라가 혼란해진 원인이 황실이 군사력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준데 있다고 생각해 무신보다 문신을 높이는 진흥책과 과거제를 시행했다. 과거제도가 지방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유교, 불교, 도교 모두 국가 통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불교, 도교가 다시 전성기를 맞자 과거제도를 통해 양성된 유교성향 신진사대부들의 저항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유교를 새롭게 해석한 성리학이 등장했고 중국은 다시 유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성리학의 가장 큰 사상적 배경은 오히려 비판대상이었던 불교, 도교사상이었다. 불교, 도교의 우주론을 가져다가 유가사상을 논리적으로 무장해 인간과 자연의 보편적 이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성리학이다.


주희: 동아시아 중세 보편적 세계관의 창시자

성리학의 중심에 선 사람은 주희다. 북송오자들의 사상을 합쳐 성리학을 완성함으로써 유학의 방향을 새롭게 바꾼 사람이다.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주희의 성에 공자 맹자 같은 최고의 존칭을 붙인 것이며, 주자학이란 주희의 사상 전체가 곧 하나의 학문체계이자 학문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주자학은 12세기 이후 동아시아 전체를 덮는 보편적 세계관이었고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으므로 동아시아 사상계의 커다란 산맥이다. 성리학을 중심에 놓고 그 위에 한나라와 당나라의 경전 해석을 합침으로써 전체 내용을 풍부하게 했고, 여기에 노장사상과 불교의 논리를 들여와 유가사상의 논리체계를 완성했으며, 문학과 사학 그리고 자연과학의 성과 까지를 합쳤다. 이렇듯 주희는 그 이전까지의 학술과 사상을 자기 사상의 체계 속에서 집대성했다. 따라서 그는 중국 사상의 흐름에서 본다면 그 이전이 모두 그에게로 모이고 그 이후가 모두 그로부터 시작되는 핵심 고리다.


왕수인: 민물의 이치를 가슴에 품은 격정의 사상가

주희는 모든 만물이 각기 제 안에 하늘에서 받은 정해진 이치를 갖고 있기에 사물 하나하나를 만나 이치를 깨달아가다 보면 어느 날 모든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주희의 이론 대로라면 사람에게도 이치가 있고 개에게도, 대나무에게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나무의 이치를 알아보기 위해 20대 초반의 왕수인과 그의 친구가 대나무 앞에 앉았다.

3일째 되던 날 친구가 쓰러졌고 일주일이 되었을 때 왕수인도 쓰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대나무는 대나무였다. 몸을 추스른 왕수인은 자신의 실험이 왜 실패했는지 곰곰이 생각한 결과, 대나무의 이치는 대나무 속에 있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대나무의 이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주희의 이론이 틀렸다면 나는 이제 누구의 이론에 따라야 하는가? 따를만한 이론이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가?

젊은 시절 이 경험이 바로 양명학을 만든 동력이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이 37세 때 맹수가 우글거리고 독사와 지네가 떼 지어 살던 용장에서의 깨달음으로 열매 맺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송나라의 학문이었다면 양명학은 명나라의 학문이었다. 더구나 양명학은 명나라 중기 이후 엄청난 혼란 속에서 싹이 튼다. 지배층의 탐욕이 부른 농민봉기에서 농민들이 내건 구호는 ‘다시 혼돈의 하늘을 열자’였다. 봉건통치 질서의 이데올로기였던 주자학은 그러한 사회적 위기를 넘어설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기에 대안이 필요했다.

왕수인은 농민봉기 진압과정에서 농민들의 적대감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기존 질서로 이들을 설득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내 마음이 이치’라는 ‘심즉리’, 내 마음과 사물의 이치를 하나로 한 것으로 하늘의 이치와 개인 주체를 나누어놓는 주자학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내놓았다.


황종희: 필부에게도 천하 흥망의 책임이 있다.

명나라 중기 이후 생산력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며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화폐사용도 활발해졌고 대토지를 지닌 지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땅을 잃는 백성들이 생겨났으며 노예로 전락했다. 토지를 가진 농민이 기본이었던 제도와 정책의 붕괴는 명나라 몰락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의식 있는 명나라 지식인들은 명나라 몰락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해 반성의 의미에서 경세치용의 방책을 마련하는데 힘썼다. 그중 가장 뛰어난 경세치용론이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으로 명말청초의 정치 현실을 비판한다. “명이대방록”의 첫 번째 장은 “임금이란 무엇인가?”이다.

‘옛 임금은 온 세상 사람들을 주인으로 삼고 임금 자신은 손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생 동안의 노력이 모두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임금이 주인이고 온 세상 사람들은 손님이라 여기니 세상이 어지러운 까닭은 모두 임금 때문이다.’라고 했다.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임금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전쟁을 통해 백성들을 혹독하게 부리고 가족이 함께 살지 못하도록 만들면서도,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손을 위해 나라를 세운다고 한다는 것이다. 나라를 세운 후에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부모 자식을 갈라놓으니 세상 사람들이 임금을 원망하고 증오하게 된다는 것이다.

황종희는 온 세상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민주사회를 꿈꿨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군주사회의 모든 혼란은 바로 군주가 주인행세를 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담사동: 변법을 위해 피를 뿌리는 사람이 되겠노라

1898년 9월 변법 개혁의 중심인 광서제는 연금되었고 양계초, 강유위 등은 피신하거나 외국공사관으로 숨었다. 주위에서는 몸을 피하라 했지만 담사동은 의연했다. 순교자처럼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세 좋게 시작한 개혁은 103일 만에 막이 내렸다.

당시 청나라는 혼란의 막바지로, 안에서는 서태후의 폭정과 지배계층의 부패와 무기력으로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밖으로는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이 무차별 침탈이 벌어졌다. 군대와 무기의 혁신을 위한 양무운동도 일본과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며 실패한 개혁이 되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것이 변법운동이었다.


양무운동이 국방을 중심으로 서구 과학기술의 도입과 경제발전이 중심이었다면, 변법운동은 정치사회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이 중심이었다. 중심인물은 강유위로 보수파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광서제가 변법을 국시로 정한 후 본격적인 개혁이 시작되었다. 일본 메이지유신을 모델 삼아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과거제도, 학교제도, 관리임용, 상업진흥책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패배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던 서태후와 추종자들이 그냥 지켜만 보지는 않았다. 서태후는 보수파를 동원하여 변법파가 쓴 책들을 비난하게 했고 강유위를 추천했던 호부상서 웅동화를 파직했다. 뒤로 물러나기는 했으나 2품 이상 관리임명권은 여전히 쥐고 있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연금시키고 정치일선으로 복귀를 선언했다.

변법파는 궁지에 몰렸다. 담사동은 옥에 갇혔고 4일 뒤 34살 젊은 나이로 5명의 동지들과 목이 잘린다. 담사동은 처형을 앞두고 “도적들을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나 상황을 바꿀 힘이 없구나. 죽을 자리를 제대로 얻었으니 기쁘고 기쁘도다.”라고 했다. 무술변법은 이렇게 끝이 났다. 처형당한 6명은 ‘무술년에 희생된 6명의 군자’로 불리고 이들의 죽음은 뒷날 역사를 바꾸는 작은 디딤돌이 되었다.

양무운동은 변법운동으로, 변법운동은 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변법운동은 혁명으로 나아가는 전 단계였고, 담사동의 죽음이 곧 혁명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모택동: 중국의 영원한 붉은 별

대장정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의 공격을 받아 강서성 서금의 중앙근거지를 버리고 새로운 근거지 확보를 위해 시작했던 고난의 행군을 가리킨다. 1934년 10월 15일 8만의 홍군이 길을 떠나며 시작해 1방면군과 중앙군이 섬서성에 도착한 것이 368일 만인 1935년 10월, 2방면군이 합류한 것까지 따지면 1936년 10월까지 계속되었다.

따라붙는 국민당군과 싸우며 11 개성, 18개 산맥, 24개 강을 건넜다. 폭격, 질병, 추위, 배고픔을 견디며 하루평균 26km, 총 12000km를 걸었다. 대장정 후 도착한 사람은 7000여 명이었다. 하지만 대장정 길목의 농민들은 잠시 스쳐가는 홍군을 도와주었고, 추격하는 국민당군의 횡포에는 치를 떨었다. 11개성을 지나며 만난 2억 이상의 중국인들에게 혁명과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리는 역할을 했고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 승리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후 4년 전투 끝에 국민당 군대를 몰아낸 모택동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 공화국을 세우고 국가주석을 맡았다. 1953년 국가재건사업인 대약진운동을 시작했다. 1958년까지 이어진 이 운동을 통해 토지개혁과 협동농장사업을 실시했다.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다. 1958년부터는 제2차 5개년 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를 내건 삼면홍기 운동을 전개했으나 1960년부터 2년간 대기근이 휩쓸며 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모택동은 주석에서 물러났다.

유소기,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실용 수정주의자가 당을 장악했고 주석을 맡은 유소기가 애써 자리 잡은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자작농을 부활시키려 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모택동과 그의 세력들은 1967년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며 당권을 다시 장악했다. 1976년 4월 모택동 절대화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천안문사태가 발생했고 그해 9월 모택동은 83세로 사망했다. 중국의 위대한 영웅 모택동은 민중과 유리된 채 죽음을 맞이했다.

모택동은 많은 어려움에도 노동자와 농민들을 계몽시켜 계급해방의 길로 나서게 했고, 이를 통해 나라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1981년 등소평이 다시 실권을 장악한 뒤 중국정부는 문화대혁명을 내란으로 규정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