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날이다. 할 일이 없거나 휴가를 작정한 날은 아니지만 그냥 일하기 싫어 일하지 않기로 한 날이다. 종일 강의가 있는 아내는 아침 일찍 출근을 했고 느지막이 침대에서 나온 나는 아점을 차려 먹으며 오늘 어디를 다녀올까 행복한 고민을 시작한다. 그냥 어딘가에 다녀오고 싶어 오늘은 한가하기로 결심했다. 복장도 정했다. 며칠 전 새로 산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남색 슬랙스에 하얀 스니커즈를 신기로 했다.
서울 서쪽 어딘가에 무게로 책을 파는 헌책방이 있다는데 오늘 그곳을 가볼까 생각해본다. 일단 후보에 올린다.
서촌에 가서 산책도 하고 역사책방에도 들러볼까. 좋은 생각이다. 후보에 올린다.
북촌을 걸어볼까. 이것도 좋다. 일단 후보.
서촌 북촌 나왔으니 경복궁이 후보에 올라야 할 것 같다. 생각해보니 경복궁 경내에 들어가 본 게 언제였는지조차 모르겠다. 경복궁에 갔다가 광화문의 서점에 들러도 좋겠다.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대충 집안 정리를 하며 목록 하나하나 곱씹는다. 결정장애를 실감한다. 결국 고르지 못한 채 일단 나가보기로 한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면서 결정하자. 지하철역에 도착하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으로 정하자. 어디로 정하건 많이 걷게 될 것 같다. 트렌치코트와 스니커즈가 조금 불편할 수 있으니 급히 복장을 바꿔 청바지에 걷기 편한 운동화를 신고 카디건을 걸친다. 아침에 결심했던 옷을 모두 다른 것으로 바꾼 꼴이다. 아무도 모르니 머쓱할 필요 없다.
지하철역으로 걷는 길가에 벌써 벚꽃이 피어있다. 날씨도 좋고 조금 설레는 기분이다. 역에 다 와서 문득 종로가 떠오른다. 종로에 볼일이 있어 가끔 가는데 종로에는 노인분들이 참 많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종로에 가까워질수록 지하철에도 노인분들의 비율이 많아진다. 코로나가 한참 위협적이던 때 지하철을 타지 않고 차를 운전해서 종로에 가곤 했다. 운전을 해서 가면 세운상가 맞은편의 종묘공원 지하에 있는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곤 했는데 처음 그곳에 차를 세웠던 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나오면서 종묘 공원에 굉장히 많은 노인분들이 계셔서 깜짝 놀랐었다. 코로나가 전혀 두렵지 않은 듯 태연하게 장기를 두거나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벤치에서 낮잠을 즐기거나 다들 한가한 어찌 보면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종묘 공원의 노인분들의 모습과 지금 어디에 가서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는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생각의 바퀴가 돌부리에 걸린 듯 덜컹하며 멈춘다. 엇 내가 아직 그럴 때는 아니잖아.
그만두자. 도서관에 가서 대출 예약해둔 책을 받아서 그냥 돌아가자. 도서관에 갔다가 도넛을 몇 개 사서 집에 돌아와 커피와 도넛을 먹는다. 서재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열고 일을 시작한다. 나는 아직 열심히 일을 할 나이야. 공원의 노인처럼 굴지 말자.
아내가 퇴근해서 돌아올 때에야 서재에서 나온다. 저녁을 먹으며 오늘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기가 다 빨렸다며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로한다. 그래도 신입생들의 패기와 열정이 귀엽다고 하니 다행이다.
텔레비전을 켜 두고 오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뒤적이는데 갑자기 생각난 오늘 낮의 내 모습에 얼굴이 벌게진다. 공원의 노인처럼 굴지 말자니. 공원에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뭐가 문제라고 그렇게 굴지 말자는 생각을 했을까. 한가할 때 한가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데 나도 모르게 공원으로 모여드는 노인분들에 대한 어떤 판단이 있었나 보다. 누구보다도 치열했을지 모를 그분들의 공원 밖에서의 시간은 짐작도 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해 버렸다.
아마 오늘 내가 즐기려 한 한가함이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저 게으름이었기에 애꿎은 다른 이들까지 끌어들였었나 보다. 혼자 부끄러워한다. 또 오늘 같은 날이 오면 떳떳하게 한가함을 즐겨야겠다. 그러려면, 평소에 게으르면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