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을 선물 받았다. 그것도 진한 애정이 묻어있는 시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한창일 때 감히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거조차 큰일이 날 듯 떠들던 시절에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뭉쳤다. 직접 대면할 수는 없었지만, 독일과 아부다비, 서울, 인천, 용인, 그리고 제주에 사는 우리는 공간에 구애 없이 서로 글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일주일에 한 번 컴퓨터 앞에서 그녀들을 만나게 어느새 3년, 그 사이 누군가는 아이들 낳았고, 누구는 책방을 열었고, 누구는 자녀를 결혼시켰다.
온라인 속 글벗이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끔 만나는 친구들보다 요즘 근황을, 속내를 더 잘 알아 가는 거 같았다. 작년 연말, 오프라인에서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장소는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근처. 나는 가지 못했다. 갈 생각조차 못 했다. 연말 바쁜 시즌이기도 했고, 서울은 제주에서 쉽게 다녀올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에 지레 포기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남았다. 2024년에는 꼭 그녀들을 직접 만나리라. 역시나 올해도 연말 모임 이야기가 나왔다. 달력을 뒤적였다. 가능한 주말 일정을 찾았다. 항공권이 있는지 검색했다. 아침 비행기로 가면 서울 어디든 점심시간 전에 갈 수 있고, 제주로 돌아가는 마지막 비행기를 예약하면 시간 걱정 없이 온전한 모임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항공권 구매라는 비용의 압박이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녀들을 만나는 기쁨과 설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한 순간부터 어떤 선물을 준비할지 고민이 되었다. 얼마 전 직접 손뜨개로 만든 컵 받침대를 동료들에게 선물한 직원이 부러워졌다. 그런 재주라도 있으면 정성스레 예쁜 무언가를 만들어 볼 텐데. 주말 오후 관광객들이 선물을 산다는 제주 동문시장으로 갔다. 시장은 역시나 사람들로 붐볐다. 좁은 시장길을 어깨가 부딪힐 듯 말 듯, 살짝 옆으로 비껴가며 걸었다.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선 곳에서 아기자기하고 예뻐 보이는 소품들을 하나씩 들어보고 만져보았다. 결국, 다 내려놓고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를 쇼핑백에 담았다. 비행기를 타고 만남의 장소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 문제다. 여러 개를 담으니 무게도 있고 부피도 만만치 않다. 하루 일정이지만 작은 캐리어를 끌고 가기로 했다. 양손 가득 들고 갔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팔부터 나가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런데 선물을 계산하려는데 내 눈에 딱 띈 게 있었다. ‘한라산 소주 미니어처’ 단번에 떠오른 글벗이 있다. 컴퓨터 화면도 감출 수 없는 발그레한 얼굴로, 한 잔 마셨다면서 굳건히 모임에 참여한 그녀. ‘술이 주는 우주’는 진짜 술을 마셔봐야 느낄 수 있다고 설파했던 그녀를 위해 마지막 선물을 가방에 담았다.
드디어, 그날이다. 마치 옆 동네라도 가듯, 글벗들을 만나러 서울에 다녀오겠다며 짐을 꾸리는 나를 딴 세상 사람인 듯 신기하게 바라봤던 신랑이 자청해서 제주공항에 태워다 주었다. 공항에 도착, 전광판을 보니 내가 탈 비행기가 지연됐다. 그래도 서울로 갈 수 있는 것이 어딘가. 탑승 안내방송이 나오자 차례차례 비행기에 올랐다. 캐리어를 선반에 올리고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마음은 이미 고속버스터미널 ‘고터’ 그곳이었다.
아기자기하고 세련된 인테리어의 레스토랑에서 우리들은 몇 년 만에 만난 오랜 친구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서로의 일상을 내년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진정 제주인을 반기는 거 같았다.
식당에서 나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작별의 시간이 되었을 때, 한라산 소주 미니어처의 주인공인 우리 모임의 맏언니인가 살며시 내게 편지를 쥐여주었다. 예상치 못한 편지에 놀람과 행복감이 교차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손편지였다.
사랑하는 00샘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나들이 용기를 내주어서 얼마나 감동이고 고마운지
선물을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너무 어여쁜 샘께 어울리는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가시다가 배고프면
우동이라도 한 그릇 드시고 가세요.
제가 끓인 것이라 생각하시고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읽고 또 읽었다. 그녀가 전해준 편지봉투에는 뭉클한 사랑 시와 우동 몇 그릇은 먹어도 될 듯한 넉넉한 현금이 함께 있었다. 귀향하는 사람들이 중간 휴게소에 들려 허기진 배를 우동 한 그릇으로 채우듯, 제주에 내려가는 나는 그녀가 애틋하게 적어 놓은 손편지 속 우동 한 그릇으로 마음을 채웠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마음이라는 걸 경험해보지 않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 받은 편지 속 사랑 시의 제목을 ‘우동 한 그릇’이라고 붙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