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좀 신작로까지만 데려다줘
마루에 걸터앉아한 손에 보따리를 쥐고 하염없이 대문을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가 아침을 먹자마자
“나 좀 신작로까지만 데려다줘. 난 검디에 가야겠어.”
검디에 왜 가냐고 물어보니 엄마, 아빠가 기다린다고 하셨다. 신작로까지만 데려다주면 택시를 타고 검디 갈 것이라고 돈도 챙기시고 엄마에게 줄 선물 보따리도 챙겨 꼭 안고 계셨다.
그 모습에 절절히 간절함으로 엉겨 붙어 있었다.
“엄마, 우리 밖에 나가 볼까?
어머니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신다.
“응, 검디 가자.”
휠체어에 올라가 앉은 후 지팡이를 가슴에 꼭 안고 가만히 계신다. 빨리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그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대문을 나서면 오르막길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약 5미터 전부터 빠르게 휠체어를 밀면서 가속력을 더해서 오르막길을 넘어서야 한다.
‘언니, 그곳을 넘으려면 아래서부터 발을 빠르게 달려서 넘어야 해. 난 잘 못 넘어갈 때가 많아서 힘들었는데 언니도 힘들 거야.’
동생이 전화로 말을 할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밖에 몇 번 나가면서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오르막길은 우리 집이 마을길 보다 낮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집으로 유입되지 않게 가장자리를 조금 볼록하게 돋아서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 오르막길을 넘어서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뭐든 반복하면 요령이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가속력을 이용하여 오르막길을 단숨에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굴려~ 굴려~”
빠르게 휠체어를 밀면서 달리기 시작하면 나에게 힘을 보태시는 어머니의 외침이다. 언덕의 마지막 끝 지점에 도달하면 어머니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시면서 휠체어에 앉은 자세로 힘을 주셨다. 아마도 딸이 힘들까 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시려는 행동이셨을 것이다.
마지막 오르막길을 통과하면 “우와!” 하고 탄성을 지르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으셨다.
오르막길을 온 힘을 다해서 올라서면 어머니가 통쾌하게 웃으셨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면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신작로 나가는 길은 수월했다. 완만한 내리막길이어서 휠체어를 꼭 잡고 운전만 잘하면 된다.
우리는 신작로에 가장자리에 지나가는 자동차가 잘 보이는 안전한 곳에 멈추었다. 엄마는 잠자코 앉아 계시다가 지나가는 택시를 가리켰다.
“택시가 저쪽으로만 가네!”
반대편으로 지나가는 택시를 안타깝게 바라보신다. 어머니가 가고 싶어 하는 쪽으로 가는 택시는 없었다. 한참 동안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태워주기를 원했지만 누구도 자동차를 세워 ‘타셔도 좋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 택시가 이쪽은 없나 봐. 오늘은 안 되겠어 내일 가야 할까 봐.”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휠체어 방향을 틀어 동네길로 접어들었다.
왼쪽으로 주민센터가 있고, 오른쪽에는 멋지게 지은 한옥이 보였다. 그 옆으로 오래된 문짝이 있는 집이 있다. 어쩜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 문짝은 세월을 비껴간 듯이 그대로였다. 50여 년이 더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도. 이 가게는 학용품을 팔고, 과자를 팔고, 추석 같은 명절에 뽑기를 팔았던 곳이었다. 달콤한 알사탕이 먹고 싶으면 십 원짜리 동전을 가지고 가면 주인이 커다란 유리병에서 동그란 알사탕을 꺼내 주면 맛있게 먹었던 생각났다. 이 가게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폐허처럼 빈집인 듯 보였다.
“빨리 가”
어릴 때 추억을 꺼내 들고 멈추어 있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재촉하신다. 집으로 가라는 것인지. 어디로 가라는 것인지 모르지만. 집으로 향해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