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과 즐거운 나들이
삼월 중순 토요일, 고속도로를 달리던 우리 차는 11시쯤 여산휴게소로 들어섰다. 이제 곧 친정 도착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인지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정읍은 내가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쳤던 곳이고, 지금도 연로하신 부모님이 지키고 계시는 곳이다. 친정어머니의 여든일곱 번째 생신을 맞아 형제자매들이 시골집으로 모두 모아기로 했는데, 나는 아이들은 집에 두고 남편과 둘이서만 내려오게 되었다. 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누가 도착했을까 궁금해져 어머니께 전화해보았다.
"아야, 네 큰오빠는 벌써 와서 밭에 나갔고, 덕인이랑 임순이가 와서 집안 청소한다고 난리도 아니다. 그리고 종득이네 식구들도 전주쯤 오고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또 누가 오고 있더라... "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생기 있게 들렸다.
지금쯤 열한 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누가 오고 있는지, 어디쯤 오고 있는지 헤아리고 계실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 형제들을 번호를 붙여 정리해보면, 형제자매들 중에 2번, 4번, 6번 오셨고, 막내인 11번 왔고, 10번 임순이, 종득 오빠는 7번 오고 있고, 나 8번 가고 있고, 우리 집 서열 1위 큰언니는 정읍시내에 살고 계시니 곧 오실 거고.....' 젊은 내 머리도 이렇게 복잡한데 구순이 다된 어머니는 정신이 하나도 없으실 것이다. 조카들까지 모이면 서로 헷갈리지 않게 이름표라도 준비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는 아들 여섯에 딸 다섯을 낳으셨다. 난 그중 여덟 번째 , 셋째 딸이다. 오빠가 다섯 있고, 언니가 둘 있고, 동생이 셋이다. 남들은 우리 남매가 11명이라고 말하면 거의 입을 반쯤 벌리고 놀라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엄마가 다 낳았냐고 물어본다. 우리 세대는 대개 6~7남매쯤은 흔하지만 11명이라는 숫자는 꽤나 충격인가 보다. 그래도 난 한 번도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은 그 많은 남매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잘 키워낸 부모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먹이고 입히고 얼마나 힘드셨을까? 마음이 찡해지면서 잘해드려야지 생각하지만, 내 살림하느라 까맣게 잊고 살 때가 많다. 우리 남매들은 나이가 들면서 부모님 외형과 성격을 닮아가며 서로 비슷비슷해지는 모습을 보면 모두 한 보모님의 유전자를 받고 나온 것은 확실하다.
잠시 후 우리도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골길을 달려 친정집 마당에 도착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계셨다. 우리를 보시고 반색하시며 맞아주신다. 먼저 온 식구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와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고, 벌써부터 시끌벅적 잔치 분위기가 났다.
마당 한쪽에 봄동과 대파가 드문드문 무더기로 자라고 있었다. 십일 남매가 날마다 살을 비비고 발을 구르며 놀았던 마당, 줄넘기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눈싸움;도 하고, 땅따먹기도 했던 넓은 마당이었는데 지금 보니 손바닥만 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올 만큼 정말 작아 보였다.
"아가씨, 점심 먹어요."
부엌에서 대가족의 점심을 준비하던 큰올케언니가 부른다. 모두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방으로 들어가니, 발 디딜 틈 없이 비좁다. 음식이 차려진 커다란 밥상 두 개에 둘러앉고도 모자라 부엌방에도 상이 차려졌다. 나도 겨우 한 자리 비집고 앉아 점심을 먹었다.
왁자지껄 점심을 먹은 후, 언니들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러 들어가고 나는 마당으로 밀려나듯 나왔다.
" 우리 칡이나 캐러 갈까?"
내 바로 위 오빠가 큰소리로 말했다.
"오빠, 나도 갈래!"
마루에 앉아 있던 막냇동생(11)이 벌떡 일어났다. 임순이(10)도 덩달아 딸이랑 가겠다고 나서고 금세 칡을 캐러 갈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오빠, 칡이 어딨는 줄은 알고?"
"걱정 마, 아주 큰 놈으로 해줄 테니까."
오빠는 웃으며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했다.
우리들은 비닐포대와 곡괭이를 찾아들고, 우르르 오빠 뒤를 다라 나섰다. 시골 마당을 벗어나 어릴 때 병정놀이를 하며 놀았던 뒷산으로 향했는데, 가족이 많지 않은 분이 이 글을 읽으면 상당히 난해할 것이므로 사람들 뒤에 숫자로 표기해 양해를 돕는다.-가령 7번 오빠의 아내는 7-1, 그의 첫 자녀는 7-1-1, 둘째 자녀는 7-1-2 이런 식으로 표기하였다. - 대열의 맨 앞에는 오빠(7)가 서고, 그 뒤를 7-1-1,7-1-2, 그다음은 나와 남편(8-1), 임순이(10), 10-1-1, 막냇동생(11), 11-1, 이런 순서로 아홉 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길을 올랐다. 산에만 가면 금방이라도 크고 굵은 칡을 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산에 도착해보니 캘만한 칡이 없었다. 몇 개 발견하긴 했는데 너무 작아서 먹잘 것 없거나 겨우ㅠ 한 개 발견해 캐려고 보면 돌무더기 속이라 캐내기가 어려워 않았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만 남기고 그곳에서 허탈하게 내려왔다. 자신만만했던 오빠가 미안한 표정으로 앞산으로 가보자고 했다. 앞산은 자기가 어렸을 때 칡을 캐봤던 곳이 몇 군데 있으니 틀림없이 지금도 있을 거라며 우리들을 설득했다. 앞산으로 진로를 바꾸자 7-1-1 조카가 재미가 없었는지 집으로 돌아갔다.
앞산으로 가는 길에는 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예전부터 물 사정이 좋은 이곳은 벼농사가 주를 이루었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잘되어 반듯반듯하니 보기는 좋을지 모르지만, 크고 작은 돌무더기로 형성되어 있는 구릉들이 없어지고 나자 그 안에서 자라고 있던 산딸기들도 없어지고 샘물이 퐁퐁퐁 쉴 새 없이 솟아 나오던 웅덩이도 없어졌다. 그리고 감나무가 유난히도 많았었는데 그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그러면 어떠랴, 구릉도 없고 평평해진 농로를 걸어도 마냥 즐거웠다. 논에는 여기저기 거뭇거뭇 벼농사를 지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오 월이 되면 이고세 벼들이 자라게 될 것이고,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농수로 가장자리에 자작자작 고여있는 물속에 미나리가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농로가 끝나고 높게 쌓아 올린 제방 앞에 다 달았다. 제방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이 많지 않은 냇가가 보였다. 제방을 쌓기 전에는 인근 학교에서 전교생이 소풍을 와서 놀고 갈 만큼 평평하고 넓은 곳이었는데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방 아래로 내려갔다. 올봄 가뭄이 심해서인지 물은 깊지 않아 보였다.
"업어줄까?"
내가 신발을 벗고 건너려 하자 남편이 말했다.
"아냐, 괜찮아!"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살은 시원했다. 물살이 거세지 않아서인지 간질간질 기분이 좋았다. 발밑에는 미끌 거리는 돌멩이 감촉도 괜찮았다. 옆에서 개구쟁이 조카(7-1-2)가 첨벙첨벙 뛰어다니며 요란하게 건넜다. 개울을 건너 3~4미터쯤 걸어서 산아래에 당도했다. 오빠는 등성이 길로 올라가지 않고 계곡으로 들어갔다. 오빠의 말은 계곡으로 올라가다 보면 칡의 뿌리가 드러나 있어 쉽게 캘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럴만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계곡에는 수많은 나무들의 뿌리가 드러나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찾는 칡뿌리는 보이지 않았다.
"어라? 이상하다 이쯤에서 하나쯤은 나와야 하는데... '
누가 먼저 와서 캐갔는지, 아예 처음부터 없었는지, 오빠의 체면을 살려줄 칡뿌리는 거기에 없는 듯했다. 계곡은 나무뿌리와 돌덩이들로 엉켜있어 위험한 곳도 몇 번 만났다. 개구쟁이 조카(7-1-2)가 장난을 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막냇동생() 11
이 바위에 난 이끼를 밟았다가 미끄러지자, 10이 다칠까 봐 걱정스러워하며 맑은 못 캐도 되니까 이쯤 해서 내려가자고 했다. 오빠는 그냥 포기하기엔 아쉽다는 듯 너희들은 위험하니깐 산 능서로 올라가라고 말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을 태세였다. 하지만 한 참 후 오빠도 능선 위로 올라오고, 우리들은 다 같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칡은 발견하지 못했어도 기분은 좋았다. 어릴 때 불렀던 동요도 흥얼거리며 내려오는데 제법 굵은 넝쿨이 나무 위를 휘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거 칡 맞을까?"
칡넝쿨치고는 좀 굵다 싶었지만 혹시나 해서 오빠를 불렀다.
"야, 맞다. 맞아! 그냥 내려가나 되나 아쉬웠는데, 큰 놈으로 찾았구나!"
오빠는 손뼉을 치며 좋아하더니 곧바로 곡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 표면은 부슬부슬하니 부드러웠다. 하지만 땅을 깊이 파 내려가면 갈수록 단단한 돌덩이가 들어 있어 파내기가 힘드러 보였다. 오빠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 동안 열중하여 땅을 파다가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수건으로 쓰윽 닦고 다시 땅을 팠다. 누구도 오빠와 교대하여 땅을 파겠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약 30 센티미터 정도 수직으로 파내려 갔을까. 오빠가 허리를 펴며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요놈 봐라! 세 갈레로 뻗어버렸네."
칡뿌리는 세 갈래로 나누어 갈고리처럼 땅을 꽉 움켜쥐듯 깊은 땅속을 향하여 뻗어 있었다. 세 갈래로 뻗어 있는 뿌리 모양새를 보니 '너도 살겠다는 의지가 참으로 강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넝쿨을 보았을 때보다 더 강한 기운도 느껴졌다. 오빠는 그중 아래쪽으로 뻗어 있는 뿌리가 캐기는 쉬울 것 같다며 몇 번 곡괭이를 내리치더니 혀를 끌끌 차며 일어섰다. 옆에 있는 나무뿌리 밑으로 기어들어가 있어 더 이상 캐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뿌리는 다행인지 땅 밑쪽보다는 비교적 평행하게 뻗어 있어서 "포기하지 않은 보람이 있다"며 좋아했다. 검고 굵은 칡뿌리는 땅을 파낼 때마다 땅속으로부터 숨겨놓은 몸체를 드러냈다. 우리들도 점점 커지는 칡뿌리를 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오빠가 땅을 파내면 옆에서 흙을 치워주고, 땅속에서 나온 돌멩이를 받아 한쪽으로 모아 두는 등 오빠를 적극 도왔다. 오빠와 우리들은 비 오듯 흘려가며 서너 시간을 시름하다 2미터쯤 되어 보이는 칡뿌리를 캐내었다.
"야, 오십 년은 족히 됐을 것 같은데
"이, 야호!"
우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오빠한테서 건네받은 칡뿌리는 단단하고 혼자 들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표면이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검은색이었다. 뿌리 귀퉁이를 잘라서 맛을 보니, 쌉싸름한 맛이 강하개 입안을 돌면서 금세 침이 고였다. 남편이 씹기가 단당 하고 칡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숫칡인 거 같다고 했다.
우리들은 칡뿌리를 들기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 전장에서 승리하고 얻은 전리품인 양 하나씩 들고일어났다. 처음에 칡 캐러 가자고 했을 때 별 시답지 않게 반응을 보였던 남편도 벌겋게 상기된 얼굴에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린 조키가 전쟁놀이에서 승리한 병사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앞장섰고 우리가 그 뒤를 따라 행진하듯 동네로 들어섰다. 마을 노인이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급하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멀거니 쳐다보았지만, 우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 아와 마당에 칡을 모아 놓았다. 부엌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던 언니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왔다가 칡을 힘 끔 쳐다보곤 별일 아니라는 듯 바로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들의 열기는 쉬 가라앉지 않았다. 상기된 얼굴로 칡 주위를 한참 동안 서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