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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Feb 28. 2023

남편과 20년째 말씨름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의사소통하는 법


나이가 벌써 오십이 넘었는데도 말을 잘하는 건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말을 잘한다는 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상대방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말을 하는 것을 넘어서 그 안의 표정, 마음, 동작까지 은연중에 드러나기 때문에 말을 잘하는 것은 기술의 문제를 넘어선다.  감정을 잘 표현해서 오해를 남기지 않고, 혹여 기분이 나쁘더라도 남의 감정을 해치지 않으면서 나의 분노를 잘 표출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참으로 말을 못 하는 사람 둘이 부부로 만나 산 세월이 20년인데도 여전히 말을 하는 문제는 우리 부부에게 쉬운 테마가 아니다. 사는 동안 에피소드도 많았다. 남편과 나, 둘 다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데다, 감정을 잘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경우라서 더 힘들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도 매 순간 조금씩 배우며 나아지고 있다.





부산으로 남편의 회사가 이전하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5년째 격주 부부로 지내고 있다. 이번 달에는 남편이 바쁜 일이 많아서 거의 한  달 만에 올라오게 되었다. 아빠 오시면 우리만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자던 아이들을 데리고 오래간만에 외식을 했다. 학원에 가 있는 큰 아이를 제외하고 우리 네 식구는 우리가 찜해둔 맛집으로 향했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막 돌아오려고 하는 참에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큰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들과 축구하러 가기로 했으니 좀 일찍 데리러 와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보통은 10시 넘어서 끝나는데 7시 반경에 전화가 왔으니 좀 일찍 공부를 마치겠다는 것이었다. 30분 뒤 큰 아이를 만나기로 하고 부지런히 평촌학원가로 향했다.






반갑게 차에 탄 큰아이가 말했다.

"슬리퍼를 안 가져왔네요. 축구하려면 운동화 신어야 하는데 집에 가서 운동화 신고 나올게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그 얘기는 그러니까, 집에 가서 운동화를 신고 나오면 아빠 보고 데려다 달라고 하는 뜻이지?"

큰 아이가 살짝 머뭇대며 말했다. "음..., 그런 거지요..."

대뜸 남편이 한마디 한다.

"싫어!!!. 그럼, 진작에 운동화를 챙겼어야지, 너만 편하게 왔다 갔다 하겠다는 얘기 아냐~"



나는 속으로 또 화들짝 했다. 이렇게 남편이 화를 내듯 말을 하는 일이 전에도 여러 번 있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자신의 편리함만 챙기려고 하는 큰아들을 보며 상한 마음을 그대로 표출하는 남편이나, 자신의 편리함이 누군가에게 불편을 준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큰 아들이 한 번에 거절을 당하고 머쓱해하며 지었을 표정이 보지 않고도 그냥 느껴졌다. 그전 같으면 쉽게 누군가의 한 마디를 거들었겠지만 요즘에는 나도 말에 신중해진 터라 뭐라고 끼어들기도 애매해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럴 때는 참 난감하다. 만약 우리가 외식을 하지 않고 집에 있었더라면 아들은 '죄송한데, 운동화 좀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누구 편을 들자니 이상하고, 가만있어도 답답하긴 매한가지다.



결국 집에 도착한 후, 아들은 신발을 바꿔 신으러 간다고 차에서 내렸다.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안 내려? 먼저 올라가."

내가 말했다 "데려다주려고?"

"나는 저 녀석 데려다줘야지 뭐." 남편이 대답했다.

'아니? 데려다 줄 거면서 뭘 굳이 저렇게 싫은 소리를 하는 거야?' 누군가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특히나 싫어하는 그 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남편의 태도에 못마땅한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 집이 있는 층에 도착하니 신발을 갈아 신은 아들이 서 있다.

"아빠 기다리고 계셔, 얼른 가. 잘 갔다 와."

아들이 말한다. "그래요? 교통카드 가지고 나왔는데요..."






다음 날, 아침 남편에게 운을 뗐다.

"나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무슨 일인지 짐작하지요?"

"아니. 왜?"

"당신 어제 수한이 데리러 갔을 때 말이야. 어차피 태워다 줄 거였는데 왜 싫다고 그렇게 말을 한 거야?"

"기분이 나쁘니까 그렇지. 아니, 저만 편하겠다고 기다렸다 데려다 달라고 하니, 기분이 좋겠어?"

"그렇지. 기분이 나쁜 건 맞는데, 싫다고 하는 거보다 차라리 말을 안 했으면 어떨까 싶어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당신 하고 나는 생각이 다른데, 내가 대답을 안 하는 건 데려다주지 않겠다는 말이야. 자기 잘못은 알고 있어야 하니까, 데려다주긴 해야겠는데 미운 생각이 들어 '싫다', 그렇게라도 말을 하는 거지 뭐."

"그래 맞아. 그러니까 침묵이 더 무게가 있는 말이란 거지. 만약 당신이 수한이가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알아차리기를 바라는 맘에서 싫다고 한 거라면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더 수한이한테는 더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거 아닐까. '싫다'라고 말해 놓고, 데려다준다면 상대방이 일단 감정이 상할 테고 오히려 '뭐야. 왜 저래?'하고 느끼지 않겠어?"

남편은 가만히 듣고 있더니 말을 이었다.

"자기 입장에서 편한 대로만 하려고 하니까, 나는 저만 생각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던 거고 당연히 데려다 주기 싫었지. 그렇지만 어떡하냐. 데려다줘야지." 

"그래, 좋네.... 그냥 지금 당신이 한 말을 그대로 느낀 대로 말로 하면 되겠네. 그럼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화를 내지 말고 말을 하란 말이네"

"아유, 요즘 찰떡같이 알아들으시네요. 만약에 내가 '아니, 당신 왜 애한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거야?' 하면 듣기 좋겠냐고요..."

"음..., 그건 그렇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걸세.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 라 분노 이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걸세.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욱해 서"라는 말이 나오는 거고, 분노를 매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거지."


"우리에게는 말이 있지 않나. 언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지. 말의 힘을, 논리적인 말을 믿는 걸세."


"권력투쟁에 관해 한 가지 더 일러둘 말이 있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지는 말게. 이것이 많은 사람이 빠지는 인간관계의 함정이지."



얼마 전에 <미움받을 용기 1>을 읽다가 남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카톡으로 두 페이지를 전달해 준 적이 있었다.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할 수 없고,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책에서 찾으면 열심히 퍼 날라준다. 다행히도 남편은 내가 보내준 글이 자신의 상황을 콕 집어 말해주는 것 같다며 위의 글을 나에게 되짚어 보내주었다. 욱하는 감정에 말을 하고 후회하기를 잘하는 자기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같아서 이런 반응이 낯설었지만 많이 기뻤다.


이 날 남편에게 보내주었던 <미움받을 용기>의 한 구절을 끄집어내며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랑 똑같지 않아? 분노를 표출하는데 화를 내지 말고 말을 사용하면 된다는 거잖아."

남편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당신,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지금 기분이 어때? 기분이 나빠?"

"아니."

"거 봐~~ 다행이네."






다음 달에 남편은 또 긴 출장을 떠난다. 문화생활을 할 수 없는 곳으로 해마다 두 번씩 장기 출장을 가는 남편은 꼭 소일거리로 읽을 책이나 재미있는 영상들을 챙겨가곤 한다. 이번에, 오랜만에 나는 책을 추천해 주었다. <미움받을 용기 1, 2권 세트>를. 남편은 아주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주문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겠지. 사람 마음 얻기도, 바꾸기도 참 어렵다지만 남은 평생 아끼고 돌봐주며 살아야 할 사람이니 어쩌겠는가? 나도 참 부족한 사람이지만 서로 옆구리 조금씩 찔러서라도 요만큼만 바뀌면 참 좋겠다.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웃을 날이 있으리라 살짝 기대도 해본다. 오늘도 우리의  이야기들이 쌓여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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