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활 타오르는 영감이 없어도 쓰기를 지속하는 일
어린시절에 책과 글쓰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끔 독후감을 써서 상을 받기는 했으니 가성비가 꽤 좋았던 것이 글쓰기에 대한 기억이다.
초등 때 주로 읽었던 책들이 오빠가 빌려온 명랑만화의 ‘꺼벙이’라든가 신동우 화백의 만화였고 중학교 때는 순정만화였다. 그 때 ‘불새의 늪’이나 ‘아르미안의 네 딸들’ 시리즈가 장안의 화제였고, 읽으면 얼굴이 빨개지는 파름문고 시리즈를 친구들은 킥킥거리며 꺼내보곤 했다. 콩닥콩닥하는 연애이야기에 홀릭해서 만화방에 죽치고 앉아 간질간질한 밀당을 이어가는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한 적은 있지만 문학성이니 위대한 서사니 하는 것을 느끼기에는 나의 책력은 심하게도 짧았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주위에는 또 왜 그리 없었는지. 아래는 서랍이 달려있고 위에는 미닫이 유리문이 있던 거실의 장식장에 손때가 묻지 않은 채로 남아있던 세계문학전집, (범한출판사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중 내가 유일하게 읽은 것이 ‘죄와 벌’, ‘제인에어’ 였다. 그 감동에 가슴이 떨리던 기억은 있지만 더 읽지 않은 걸 보면 그 이상의 재미를 느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이 들어보니 그런 두꺼운 책들이 재미있다. 나이 마흔이 되면 고전에 관심을 갖는게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나는 마흔도 훨씬 넘은 오십줄이라 더 슬퍼진다. 조금 더 영리했더라면, 좀 더 나에 대해 고민했더라면 세계문학과 철학서들을 일찍 손에 붙들게 되었을까? 물론 이런 책을 읽고 작가들의 천재성을 독파해보기란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엿보기라도 하며 그들의 사유를 조금은 따라가보고 싶다. 쓰기도 마찬가지일까? 지금은 쓸 것이 없다고, 왜 굳이 내 머리를 스스로 아프게 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행여 십 여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어린 시절 책을 읽지 않은 나를 위로하며 책을 붙들고 있는 나를 보듯 아쉬움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요즘에도 가끔 떠오르는 생각들을 여기저기 끄적거리곤 한다. 그렇게 간간이라도 기록을 하려고 하는데 꾸준한 기록이 정말 얼만큼 내게 삶의 중심을 잡게 해 줄지는 아직 미지수다. 나에게 대단한 영감과 불꽃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순간 순간 느끼는 의심과 감동이 내 생활 중에도 일어나는 건 분명하다. 누구에게나 삶은 그런 낯섬과 기쁨을 안겨준다. 그러기에 소소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괜찮다. 단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니 기왕 그럴거면 내 일상에 던져진 것들에 숨은그림찾기 하듯 의미를 열심히 찾아보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