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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은 Feb 01. 2022

Berlin은 당신에게 어떤 도시인가요?

우연히 카페에 갔다가 베를린을 주제로 한 잡지를 발견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어? 나 여기 갔었는데? 나 여기서 커피 마셨었는데? 하면서 시작된 갑분 베를린 추억 여행.

내가 다녔던 여행지 중에 런던만큼 안전했고, 기묘한 매력이 가득했던 베를린. 심지어 한국인을 딱 2번 봤을 정도로(현지 가이드분이랑 베를린 필하모닉 근처 햄버거집에서 음악 하는 유학생들) 아시안을 잘 볼 수 없는 도시였다. 덕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혹은 걸리버 여행기에 거인국을 방문한 걸리버처럼 완벽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무뚝뚝했었다. 말은 지지리도 안 통하지.  뭔갈 말하고 싶어도 그때 당시 구글 번역은 생각보다 매끄럽지 않았다. 거의 눈치코치로 살아남고, 말을 주는 뉘앙스로 생존에 가까운 생활을 했었던 순간. 진짜. Excuse me, 혹은 Excuse-moi. 이 말에 해당되는 독일어는 모르겠고, 당케만 주야장천 떠들고 다녔으니까.

기억나는 순간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올리브영 같은 곳이 있는데 dm에서 물건을 왕창 사서(심지어 베를린 아니고 함부르크에서..) 면세해달라고 했다가 60대로 추정되는 할머니한테 눈으로 욕먹은 기억과, 베를린에서 맛집으로 유추되는 태국 음식점에 가서  시까지 운영하냐고 물어봤다가 구글 번역의 실패로 의사소통에 완벽히 실패했던 기억, 빨래방 찾으러 (당시 숙소서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근처), 동베를린의 끝까지 넘어가 수중엔 단돈 10유로+  통함+  11시로 인해 극강의 공포심을 느꼈던 순간들.

모두 언어적인 의사소통 실패와 보통  10시엔 숙소에서 쉬는  선택하는 성향에 반대되는 행위로 인한 기억들인데, 문화적인 기억들도 생생하다. 사실 베를린은 베를린 필하모닉이 유명한데, 내가 갔을 때는 공연을 토요일에만 이뤄진 터라 나랑 일정이 맞지 않아 관람하지 못했었다. 관람하지못해 아쉬웠지만 유럽의 정취나 풍경을 생각하면 베를린 필하모닉의 느낌은 고개를 끄덕거릴  있다.

베를린에 뉴욕의 소호 같은 공간이 있다. 이제껏 딱딱하고 빈틈없는 독일식 공간과 독일식 사람들을 만났다면  공간은 완벽하게 이질적이다. 헤어 메이크업 코디가 모두 “여기가 베를린이라고? 독일이라고?” 질문을 던지고 싶게 만드는 사람들과 공간들. 히피족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온 건가 싶을 정도로. 너한테 피해를 주지 않을 테니, 대신 너도 나도 서로의 취향과 행위는 인정해주자.  말이 강력하게 오감으로 들어오는 공간이었다.

베를린이 또 매력적이었던 건 과거 번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공간이자, 미래지향적인 공간들도 있으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공간이고, 도시 전체가 추모의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단순히 유대인만을 저격한 것이 아닌, 아리아인 혈통 우월주의에 의해 집시, 장애인 등 “위대한 아리아인”이 아니다 여겨지는 존재들 모두를 학살을 자행했다. (이날 진짜 다양한 추모의 공간들을 보면서 머리도 마음도 다 같이 아팠다.) 어느 나라처럼 그 걸 은폐하려 하지 않고, 구구절절 교육으로 또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게 하지 않으려 하고, 교육의 시기가 끝나면 고개를 들어 보이는 곳곳에 추모 공간을 건립하여 “잊지 말자, 우리의 잘못을.”을 외치는 것 같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독일인은 자부심이 강하지.’라는 우리의 관념이 여기서 생긴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 시원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들, 그리고 공간들.

코로나 시대가 끝나면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들 중 하나인 베를린. 2016년에 내가 갔던 공간들은 그대로일까?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정말 고생을 많이 했었던 도시였지만, 그만큼 언어가 아닌 다른 감각으로 많이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던 참 멋있던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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