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를 처음 본 건 올해 봄이었다.
변성기도 오지 않은 듯한 귀여운 야옹 소리를 아침에 달리기 하던 와이프가 우연히 들었다. 인기척에 잽싸게 잡목 뒤로 숨어버린 그 어린 고양이에게 쭈르를 준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얼굴이라도 볼라치면 금세 아파트 아래 빈틈에 숨어버리는 이 어린 길냥이를 와이프는 '그레'라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털색깔이 그레이 색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것일까?
그레에게 가까이 가면 빈틈으로 숨어버렸다. 얼핏 본 바로 며칠은 족히 굶은 듯한 앙상한 몸이었다. 숨는 곳 바로 앞에 빈용기를 가져다 놓고 쭈르(고양이 간식)을 짜놓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갈 때까지 나오지 않더니 언젠가부터 슬며시 나와 경계하며 먹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와이프 한정으로 그렇다.
내가 있으면 나오지 않았다. 하여간 며칠을 쭈르를 주다 보니 그걸로는 영양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서 사료와 물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밥을 주러 갈 때마다 와이프는 '그레~'하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게 이 녀석이 '야옹'하고 대답을 했다. 잡목 뒤에서 대답을 하고, 잡목 앞으로 달려 나와 와이프를 맞이했다.
다시 '그레~'하고 부르면, '야옹'하고 대답하고, 밥자리로 달려갈 것처럼 서있다. 그러다 또 '그레~'하고 부르며 다가가면 도망가면서 '야옹'했다. 재미있어서 계속 부르면 이 녀석도 계속 대답을 했다.
와이프는 싱글싱글 웃으며 밥자리로 가면 그레는 건물과 땅 사이의 틈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것도 웃긴 게 처음에는 완전히 몸을 숨겼다가, 언젠가부터는 발은 내놓고 있다가, 또 언젠가부터는 근처에서 밥을 주는 것을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자리를 완전히 비켜줄 때까지 안 먹었다가, 얼마 후에는 뒤로 서너 걸음 떨어졌더니 조심스레 와서 눈치를 보며 먹었다. 그렇게 참 감질나게 가까워졌다.
그레는 참 이쁘게 생겼다.
너무 가까이 가면 하악질을 했지만, 조금 떨어져서 부르면 매번 ‘야옹’ 대답을 했다. 까시러 졌지만 순진한 사춘기 아이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5월 초에 우리가 2박 3일 강화도 여행을 계획하며 걱정이 생겼다. 매일 아침을 주다가 이틀을 주지 못하게 되면서 마음이 몹시 불편해졌다. 우리가 이 녀석에게 얽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서로 인연이 없었는데, 관심을 주고, 밥을 주고, 이름을 부르고 관계를 형성하면서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책임감이 생겼던 것이다. 책임감은 구속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여행을 다니면서도 문득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레를 보고 처음으로 고양이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렇게 인연을 짓는다는 것의 이면을 느끼니 역시 애완동물을 함부로 키우는 게 아니라는 생각, 끝까지 책임질 것이 아니라면 쉽게 인연을 맺는 게 아님을 느꼈다.
여행 마지막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레를 보러 갔지만 없었다. 그 뒤로 드문드문 보다가 언젠가부터 그레가 없었다. 매일 밥그릇이 비었길래 그래도 와서 먹겠거니 했는데, 어느 날 밥자리에서 슬금슬금 도망가는 고양이는 그레가 아니었다. 다른 고양이였다.
와이프가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그 자리가 맛집으로 소문나 다른 고양이들에게 쫓겨났을 거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곳은 다른 고양이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다. 후각이 발달한 다른 동네 냥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 불량하게 생긴 덩치 큰 검정고양이도 지나가는 걸 본 게 생각나기도 했다. 보호자 없는 어린 길냥이가 차지할 수 없는 곳이었다.
비도 피하고 숨어 지내기도 꽤 좋은 지낼 곳이었지만, 그동안 우리가 밥을 준 것이 오히려 그레가 쫓겨나는 이유가 되기도 한 것 같다.
그 뒤로 그레는 사라졌다.
어디로 간지 모르겠다. 그레는 하악질을 하며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부르면 대답을 하고 아는 척을 하던 그레가 보고 싶다.
지난 주였던가?
새끼 고양이 4마리를 거느린 어미 고양이를 우연히 발견했다. 어미도 참 이쁘게 생겼는데 새끼들이 유독 그레를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다른 동네냥이들의 새끼들을 다 봤는데 이렇게 그레와 비슷한 녀석들은 처음이었다.
와이프는 새끼들의 아빠가 그레 같다고 했다.
와이프는 어미 고양이에게 '너 그레 알아?'라고 물었지만 ㅎㅎ 어미는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