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더 아일랜드
도시살이 29년 차인 나는 그날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캐나다 서쪽 끝 어느 작은 섬에 시골살이를 하려 배에 올라탔다.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지 두 달이 지났을 쯤이었다. 밴쿠버에서 남서쪽으로 다시 두 시간, 미국 국경을 지나면 보이는 펜더 아일랜드.
섬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던의 차가 보였다.
다니: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던: 어머, 짐이 꽤 많구나, 스케이드 보드도 가져왔네. 아마 길이 험해서 타기 힘들 수도 있어.
우리가 탄 차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점점 섬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던: 여긴 우리 섬 다운타운이야, 꽤 귀엽지?
다운타운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조금은 멋쩍은 1층짜리 건물 몇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10분이면 다 볼 정도로 소박했다. 꼭 필요한 병원, 식료품점, 문방구 등이 하나씩 나란히 위치해 있었다.
던: 이제 거의 다 왔어. 이미 와있는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오늘 밤에 근처 헛간에서 하는 코미디쇼에 간다고 하니까 한 번 같이 가보렴.
차가 멈추고 밖으로 나오자, 눈도 못 뜰 정도로 엄청난 먼지가 일어 금세 온몸이 먼지로 뒤덮였다.
먼지가 좀 가라앉자 던과 조 부부가 살고 있는 나무집이 가장 먼저 보였다. 조그만 요크셔테리어 강아지가 다가오진 않고 멀찍이서 미친듯이 짖어댔다.
던: 제발, 루디! 어휴, 쟤는 원체 겁이 많아서 낯선 사람 보면 한 동안 짖을건데, 그냥 익숙해질 시간을 좀 주렴.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명상용 대형 천막, 조아저씨가 직접 옆 산에서 베어 온 나무로 목공일을 하는 작업공간, 나무로 지어진 샤워실, 드넓은 마당, 그리고 그 한편엔 작은 비닐하우스가 차례로 보이는데, 중고등학교 건물이 같이 있는 학교 운동장보다 어쩌면 더 큰 것 같다.
던: 여긴 호주에서 온 트리시가 지내는 텐트... 그리고 좀 더 걸어가면 다니가 지낼 곳은 여기야. 6인용이라 혼자 쓰기엔 충분히 클 거야.
게스트가 머무는 텐트는 숲 속 안 쪽에 띄엄띄엄 놓여있었다.
뉴질랜드에서 온 트리시, 온타리오 주에서 온 사라, 독일에서 온 알리사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 온 투코. 앞으로 2주 간 같이 생활할 친구들이다.
불빛 하나 없는 산 속이라 금방 밤이 찾아왔고 나는 어설프게 난생처음 슬리핑백을 낑낑거리며 펼쳐 첫 날밤을 날 준비를 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바람에 나뭇잎들이 서로 무수히 부딪히는 소리와 가끔가다 조그만 동물 같은 것이 재빠르게 사라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전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던 이 뜬금없는 섬 한가운데 어딘가 누워서 잠을 청하려는 이 상황이 참 기묘했다.
'참 재밌는 인생이야.'
첫 텐트생활에 설레어 한 동안 잠을 설치다 겨우 잠에 들었다.
3일 차 월요일. 우리가 처음으로 맡은 일은 사유지인 야산에 한 번에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산책용 트레일을 만드는 일이었다. 날 것의 길들여지지 않은 산을 돌아다니면서 산책하기에 적당할 법한 루트를 리본으로 표시하고, 다시 그 길을 따라 바닥의 잔가지 같은 것들을 치우고 나무베딩을 깔아 길이 잘 보이도록 하면 되는 단순한 반복 작업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이끼 (Moss), 갈퀴 (Rake), Wheelbarrow (손수레).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발자로 인턴을 할 때엔 이런 단어들을 쓸 일이 없었던 지라 나는 사실 조아저씨가 하는 설명을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많이 당황스러웠다.
'이상하다... 악센트도 없으신데 왜 못 알아듣겠지..?'
일단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서 눈치껏 친구들을 따라 갈퀴를 가져와 땅을 박박 긁어댔다.
'다 깨끗이 치워버리니까 길이 잘 보이네!'
트리시가 다가와 다정한 목소리로 그런 나를 말렸다.
트리시: 다니, 길이 잘 보이게 만드는 게 목표니까 바닥에 원래 있던 살아있는 이끼 같은 것들은 최대한 해치지 말자. 다 긁어버리는 대신에 옆에 죽은 통나무들을 부셔서 깔면 길도 더 잘 보이고 이끼도 살릴 수 있을 거야.
도시에선 잘 통했던 사고방식이 이곳과는 썩 조화롭지 못한 듯하다. 무대포식의 목표 입력, 결과 출력은 자연 그대로를 배려하는 섬세함까지 고려하기엔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길을 만들겠다고 무작정 산을 박박 긁어대던 나에게 트리시가 해준 말이 참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뒤론 갈퀴로 살살 굵은 가지들만 긁어냈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다녔던 그 산길들이 처음엔 이런 과정을 거쳐 생겨났겠구나 싶었다.
다니: 산길이 애초에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고요.
던: 세상엔 감사히 생각해야 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참 많지 않니?
이른 저녁 풀밭에서 프리스비를 던지고 노는 투코와 조사이에 냉큼 끼어들었다. '저번에 한 번 해봤으니까 잘할 수 있겠지?'
다니: 음... 안 되겠다. 그냥 나 다시 알려줘.
투코: 손목 스냅을 이렇게 해야 멀리 날아.
사라: 다니, 그냥 몸에 힘을 빼고 잘하려고 하지 말아 봐! 그냥 아무렇게나 훅 던져봐.
몸에 힘을 빼는 제스처를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하고선 대충 휙 던졌다.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다.
오, 진짜네! 그래. 다 잘할 수도, 잘하려고 할 필요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