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첫 직장 생활, 군대 초임 관리자
(지난 7월, 수해 실종자 수색을 하다가 사망한 채수근 해병의 명복을 빈다. 8월 현재 전 세계 청소년이 참석한 국제 잼보리 대회에서 행사 사고가 마음 무겁다. 앞으로 2~3년 후면 두 아들을 각각 군대에 보내야 하리라 서서히 내 일 처럼 느껴진다. 난 군대 생활을 전투경찰대와 기동대 소대장으로 대체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써본다.
1997년 3월 졸업했다.
3월 졸업 후 3개월을 인천 경찰종합학교(지금의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 에서 전술지휘과정이라는 이름으로 합숙 훈련을 했다. 현직 경찰로 급여를 받으며 전투경찰대에서 배워야 할 군사 지식 등을 배우는 시기였다.
필수불가결하게 배워야 하는 컨텐츠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 돌이켜 보면 3월 졸업 후 7월 하반기 정기 인사발령 시기 까지 115명의 경위를 교육시키면서 시기를 맞추려는 의의였던 듯.
졸업 후 첫 보직은 제주도 전투경찰대 였다.
전투경찰대는 1970년 '전투경찰설치법'에 근거해 만든 경찰 내 군사 조직이다. 역사적 연혁은 1968년 김신조 사건의 영향이 컸다. 김신조 무장간첩단은 북한에서 내려와 청와대 진입을 목적으로 세검정까지 내려와 교전하다 사망하거나 체포했다. 그 충격은 우리 사회의 여러 체제를 바꿨다. 대표적인 것이 주민등록와 지문날인제도이다. 1968년 주민등록법 개정으로 현재의 주민등록번호와 열 손가락 지문 등록 제도가 만들어졌다. 사회 통제를 강화한 하며 군사체제도 강화한 것이 '전투경찰대'이다.
전투경찰대는 병역입대한 이들 중 일부를 경찰청으로 배속해서 비정규 전투를 대비한 부대에 배치한 것이다. 산악이나 해변에 전투경찰대가 있었다. 전투경찰대는 해안선 등 국경을 지키거나, 공항 등 중요 시설, 도심 외곽 등 경비를 주 임무로 했다. 경찰이 국경을 지킨다. 원래 국경은 경찰이 지키는 것이 국제 관례(?)이다. 분쟁지역 국경 정도만을 군이 지킨다. 우리나라의 북쪽 경계는 휴전지역이기에 군이 지킨다. 분쟁지역이 아닌 경계는 경찰이 지킨다. 그래서 독도도 경찰이 지킨다.
1980년대에 들어오며 집회 시위가 많아지니, 전투경찰대도 주로 시위 진압을 했다. 경찰은 국방부와 협약해서 경찰대학생에 대한 특전으로 전투경찰대, 의무경찰대 소대장 근무로 병역을 대체했다. 그래서 경찰대학 졸업생이 전투경찰대가 첫 근무지였다.
97년 당시엔 집회시위가 여전히 격렬했다. 내 경찰대학 시기는 민주정의당 정권 김영삼 대통령 임기 중이었고 졸업한 해가 5년 임기의 마지막 해였다. 4학년이던 1996년 여름엔 연세대 한총련 출범식에서 큰 충돌이 일어나 전투경찰 1명이 사망했다. 점차 변해갔지만 여전히 집회 현장에서는 돌, 쇠파이프는 자주 나오고, 가끔씩 화염병도 보곤 했다.
4학년 여름방학 때 교통사고로 여전히 달리기는 어려우니,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서울에서 근무하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고향인 광주도 만만치 않았다. 광주도 전통있는 학생운동 도시였다. 그러다보니 제주도를 골랐다.
졸업한 후 첫 근무지를 배정하는 경쟁 기준은 졸업 성적이었다. 4학년 교통사고로 학사 관리를 참 못했음에도 벌어놓은 학점이 괜찮아서 원하는 곳을 선택할수 있었다. 당시 제주도로 배정받은 동기와 1:1로 바꿨다. 서울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있어서 원거리 교제를 걱정했는데, 참 고마워했더랬다. '고마우면 낚시대 괜찮을 거 하나 사주라'했는데 받지 못했다. 나중에 사귀던 아가씨와 결혼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그래서 97년 7월 발령받은 곳이 제주경찰청 901 전경대대 312전투경찰대가 첫 근무지였다.
97년 상반기에는 제주공항 경비가 주 업무를 했다. 하반기엔 예비 중대 역할로 바뀌었다. 전투경찰대 한 소대가 40명 정도와 본부소대 20명 총 180명 정도가 한 식구로 살아간다. 경비소대는 부대 업무를 수행하고, 본부소대는 인사, 보급, 작전의 부대 행정을 한다. 난 본부 소대를 담당하는 부중대장 일을 했다.
부중대장은 부대의 인사 발령, 교육, 징계를 직접 담당하고, 장비, 의복 등의 보급과 근무, 훈련의 작전을 1차 감독한다. 중대장 부재시 대리하고 부대 업무를 통합한다. 기안문과 시행문의 차이점, 한글 프로그램 등 초짜 기술은 물론, 주보 월보 기보 등의 행정 관행 등을 배웠다. 문서를 작성하고 점검을 대비하며 일을 함께 해나가는 태도를 익혔다.
권ㅇ상병이 처음 만난 대원이지만, 스승 같은 이었다. 작고 단단한 친구였다. 그 후임인 한모 일병 도 유쾌했다. 경리의 김S, 곽H, 작전의 박, 전,, 나가서도 가끔 보자고 했는데, 한두명을 한 두번 봤다.
동기생 B, N, L등이 함께 배치받았다. 전경대장 윤모 경감님이 인생 첫 상사이셨다. 경찰생활은 커녕 행정업무도 처음인 나의 실수를 차분히 가르쳐주셨다. 초임지에서 만난 이들 중 사이가 좋았던 분들은 여전히 생각난다. 1962년 띠동갑 형님들이 제주도 전투경찰대 직원 승진시험으로 오셨기에 정B, 김Y, 이W, 이S 경사님들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312전경대는 원래 제주공항경찰대 외곽경비를 했다. 제주공항의 외곽센터가 약 40km 정도인데, 5개 소대가 권역을 나눠서 경비하는 역할이었다. 경비 구역의 중간에 소대 막사를 두고 40명이 살았다. 취사병을 지정해 밥도 해먹는데, 며칠에 한번씩 막사별로 식자재를 나눠줬다.
10대후반부터 40대 초반의 남자들 180명이 모여 사는데 일이 얼마나 많았겠나?
하반기 중대장, 두번째 상사였던 김모 경감님은 감정 기복이 상당한 이였다. 회식을 좋아해 술을 자주 샀지만, 화도 잦았다. 어느 날엔 경찰관의 징계를 지시했다. 규칙상 중대장에게 경장 이하의 중대원에 대한 징계를 요구할 수 있었다. '영창'의 징계를 상정하고 절차를 진행하라 했는데, 며칠간 묵혔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사유도 적절치 않았다고 생각했고, 경찰관을 '영창'에 처하는 건 사문화된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지나, 어찌 됐냐 물으셔서 대답을 못하고 있었더니, 결재를 받으러 같던 서류철을 집어 던졌다. 결재판에서 서류가 흩날려 떨어졌다. 1초간 생각했다. 1)이게 무슨 짓이냐 따진다 2)그냥 나온다 3)서류를 집어서 나온다
서류를 주섬주섬 집어서 나왔다. 바깥에서 고성을 들었던 동료들이 다가와서 토닥여줬다. '응응 우리 부대장은 이제 어디서도 잘 해나갈 수 있어. 잘했어' 위로와 격려였지만, 한편 '굴종적인 태도를 내면화하는 시작이었지 않나' 씁쓸하기도 하다.
상층부도 서열을 강력하게 세우려 하는데, 퇴근도 사생활도 없이 한 공간에서 24시간 살아가야 하는 20대의 대원들은 어쨌겠나. 모든 소대들이 번갈아 한달에 한번씩은 구타 가혹행위 사고를 발견한다. 부중대장인 내가 할 정도이니 소대장, 부소대장들은 더 많이 알았으리라. 인사 담당인 나는 통상 중대장, 대대장 보고후 징계 절차를 진행하자고 한다. 반면 소대장, 부소대장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기다려달라고 한다. 어른의 사정들은 모두에게 복잡했다. 그렇게 영창 후 타중대 발령하는 것이 해법인지도 확신할수도 없다. 가장 문제는 군대 제도와 열악한 근무 환경 자체이기 때문이다.
넘치는 에너지와 일탈도 어쩔수 없었다. 우리 부대가 아닌 다른 전경대는 대부분 제주도 해변 경계를 했다. 해변경계 중인 두 대원이 초소에 술을 가져와 근무 시간 중에 얼큰하게 마시고 제주 시내로 2차를 가자고 했다. 해변에서 총을 맨 채로 히치 하이킹을 하려 했다!. 그러다가 해변 경계 근무 순시 중이던 대대장 차량을 만났다! 이런 사실 여부를 알수 없는 전설같은 일을 건네 들었다.
술, 축구 같은 분출구가 아님 2년 반을 어찌 보냈겠나, 1년에 한번 대대 체육대회에는 어마어마 열기가 쏟아졌다. 상대팀의 허리를 꺾어버리겠다는 패기의 충돌, 지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압권은 부대별 장기 자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경연의 취지는 사라지고, 얼큰한 광기의 떼춤만 남았다. 단골 술집 종업원들도 방문해 장기 자랑에 참석했는데 그 광기에 휩쓸려 낭패를 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들 중에서 추억할 수 있는 소재를 모아 문집을 만들었다. 제목이 주제 상징이었던 <천마>였던가? 각 소대의 글, 사진을 모아서 묶었다. 대담코너도 만들었는데 '설화'를 겪었다. 문제가 된 지점이 뭐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대원들이 힘들다. 문제가 생겨도 간부들에게 보고하기 보다는 우리끼리 덮으려 한다. 좀더 진솔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 등의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를 공감하기 바라서 였다. 너무 뻔해서 아무도 관심안가질 줄 알았는데 그리 혼날 줄이야.
뭐가를 해보겠다고 아무도 안시키는 일을 하다가 혼나는 것은 초임지부터의 종특이었던 듯
위험하거나 무서운 임무를 맡은 부대는 아니었지만, 군대는 군대였다. 디스크, 봉화직염 등 부상이 심해서 제대를 앞당기는 일도 했다. 취사대원이 손가락 부상을 크게 겪은 날도 생각난다. 담당 소대장이 병원을 다녀오겠다고 알려주셔서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30분쯤 지나서,, 의사가 '떨어진 살집이 너무 커서 붙여서 꿰매는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며 취사장에서 찾아달라고 해서 발칵 뒤집혀 찾았다.
그런 젊은이들을 국가가 데리고 있으면서 성장은 커녕 안전도 장담하지 못하는게 아닌가 착찹했다.
제주도는 전투경찰대에 친절하지 않은 편이었다. 제주도 사람이 '육지사람'에 대한 경계, 반감이 있다는 것을 1년간 살아보고서야 알았다. 제주 토박이 경찰은 육지에서 대거 발령받아온 '육지 출신의 전투경찰대'를 싫어한다는 것을 금방 알았다. 기관의 규칙 준수 여부를 점검하는 감찰의 방문이 너무 잦았다. 상급 부대의 순시처럼 부대를 뒤집어놓을 때도 있었다.
여러 경로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투사받는 강압을 경험하면서 조금 능숙한 경찰관이 되었다. 제주도 전경대는 대기, 경계 업무를 하며 함께 생활을 보내는 것이다. 경찰의 본질, 국가 폭력의 역할과 괴리는 다음 근무지인 광주의 기동대에서 보다 가까이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