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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우 Oct 20. 2022

이범선 <고장난 문>

이범선의 <고장난 문>에 나오는 화가는 자신의 화실에 문이 잠기자 처음에는 곧 열리겠지, 했는데 집에서 자잘한 일을 봐 주고 있는 만덕이가 밖에서 열쇠로 열어 봐도, 아무리 문을 열어 보려고 해도 문이 열리지 않자 점차 미쳐 간다. 자신은 숨이 막혀 죽을 것이라고 하며 말이다. 창살이 달린 창문도 있고, 화실 안에는 냉장고나 화장실 및 기본 시설이 다 되어 있어 질식은 고사하고 마음만 먹으면 그 안에서도 얼마든지 지낼 수 있음에도 그랬다. 기실 문이 멀쩡할 때도 작업을 할 때는 며칠이고 두문불출 하던 그였다.



화가는 지나치게 예민해져가고, 만덕이는 좀 의아하다 싶을 정도로 여유를 부린다. 목수를 부르러 갔는데 그이는 술에 취해 잠들었으니 하룻밤만 자고 나면 문을 열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화가가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를 못하는 눈치다. 책을 읽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어도 화가가 저렇게까지 난리를 치면 문을 부수어서라도 열어보려는 시도를 할 법도 한데 작가는 상황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므로 만덕이는 그저 여유롭다.



다음날 목수가 와서 문을 열어주고 화가는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는가 하였는데 움직이지 않아 살펴보니 숨을 거둔 상태였고, 사인은 질식사였다.



그냥 읽으면, 창문이 열려 있는데 질식사라니 말이 되나? 뭐 이런 작품이.. 라는 생각이 들 것이고, 선생님은 화실 안에서 며칠이고 잘 계셨잖아요 라는 만덕이의 말에 그건 내가 밖으로 안 나갔던 것이고 이것은 못 나가는 것 아니냐! 라고 외치는 대사를 곱씹어 보자면 자유를 빼앗겼다고 여긴 자가 점점 문이 안 열리는 것에 집착하여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노시보 효과를 생각해 보게 한다. 



장자가 누구랑 숲길을 걷다가 말라 휘어 비틀어진 나무를 보았는데, 그 누구가, 저 나무는 생긴 게 저래가지고 땔감으로도 가구로도 쓰이지 못한다고 하자 장자가, 저렇게 생긴 덕에 땔감으로도 가구로도 쓰이지 않아 살아남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이 나무야 말로 자신의 쓸모없음을 가장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이를 통해서는 화가가 조금만 진정을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더라면 그리 허무하게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을텐데 지 팔자 지가 꼰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마음을 편히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라는 교훈에 이르게도 된다.



한국단편은 한번씩 되게 재밌다. 이제 와 재미가 있다. 공부로 배워야 했던 학창시절엔 읽어도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것 같다. 이런저런 한국단편은 중고교 시절에 읽은 게 다인데 이렇게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면 그 때와는 다른 게 보이고 읽힐 것이다. 아무렴 그렇지 않겠는가, 아는 만큼 보이고 겪은 만큼 공감이 더 잘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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