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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우 Oct 23. 2022

감사일기보다는 불행 중 다행

며칠전에 문득 감사일기를 써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밤에 솟아나는 감성과 일상을 좀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한마디로 의욕이 넘쳐나는 시간에 한 생각이다. 한 번 앓고 나서 새삼스레 매일을 더 소중하고 알차게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감사일기로까지 이어진걸까?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다라는 바람이 감사일기장 인터넷쇼핑으로 끝나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술을 좋아하고 맥주는 자주 마시기도 하는데 아프고 나서는 마실 수가 없었다. 아플 때는 아파서 술이 뭐야 정신도 차리기 힘들었고 몸이 좀 나아간다 싶었을 때는 그런 기분이 반가웠고 이제 되었다 싶을.. 아니, 이제 되었다 라는 생각은 사실 지금도 들지는 않는다. 식욕도 점차 돌아왔고(아쉽다) 식사량도 평상시 수준을 되찾았지만(안타깝다!)술은 어쩐지 꺼려졌다. 이건 아쉽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 결국 돌아오리라는 것을 22년차 술쟁이는 당연히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말입니다, 이틀 전 금요일 밤에 아이들도 자러 들어간 깊은 밤에 좀 심심했다. 제주도 모든 올레길에 족적을 남기리라 하며 친구와 제주도로 떠난 그의 빈자리가 너무 컸던 것인가! 아무튼 할 일을 다 해 놓고 야심차게 와인을 하나 땄다. 술이란 다 냉장고에 들어가 있긴 하지만 맥주는 찬 기운이 있는 듯해 꺼려졌다. 넷플릭스로 영상 하나 틀어놓고 와인을 홀짝 거리고 있으려니 오우 나 이제 일상으로 다 돌아온건가? 



두 잔째를 따라놓고 다시 영상을 보고 있는데 자꾸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웠다. 뭐지? 하고 보니 이 반점은 뭐야? 하고 소매를 쓱 걷었다가 헉, 옷을 까서 배를 보고는 엄마야! 바지를 쑥 내려서 온 몸을 다 살펴보고 두드러기가 온 몸에 퍼져 있는 걸 보고 놀란 다음에는 너무 징그러워서(환 공포증이 있다)따라놓은 와인을 내다버렸다.



검색창에 와인 두드러기를 쳐 봤다. 처음 먹어 보는 와인도 아니지만 이거 마시기 전에는 아무 문제 없었으니 원인은 와인 아니겠나? 와인이 범인이어야 하는 내 시선은 당연히 관련 글들만 눈에 들어왔고, 아침에 눈 뜨는대로 약국을 가 봐야겠다 하고는 얼른 잠자리에 들었지만 쉬 잠이 오지 않았다. 금방 안 사라지면 어떡하지? 근데 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병원을 가야 하는 걸까? 와인이 상했나? 이주 동안 금욕적인 생활을 해서 몸이 놀랐나? 이제 영원히 술은 못 마시는 걸까?(이 생각마저 했다)



잠인들 제대로 잤겠는가, 실은 한 숨도 못 잔게 아닐까 하는 기분으로 일어나 거울을 보고 조금도 차도가 없음을, 심지어 아침에 보니 더더욱 징그러워서 바로 피부과에 다녀왔다. 토요일 오전이라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그래도 진료를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진료 끝에 의사는 와인이 발진(이라고 표현하더라)을 피부 위로 유발시키는데 작용을 했을지는 몰라도 와인 자체가 발진의 원인은 아니라며 얼마전에 먹었다던 약 중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성분이 있는 것 같다고 짐작이 되나, 이 발진이 꽃가루 때문이든 약 때문이든 가라앉히는 데 쓰는 약은 일정하니 혹시 자신의 판단이 틀렸더라도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라고 했다. 우와.. 원인은 모르지만 가라앉힐 수 있다라는 뜻이지? 아무튼 나는 약을 받아왔고, 집에 오는 길에주사라도 한 대 놔 달라고 할 걸 후회했다. 손등까지 퍼졌단 말야.. 월요일에 당장 우짜라고 ㅠㅠ



이러니 내가 감사일기를 쓸 수 있겠나? 감사일기를 써 볼까 하는 밤에 이리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평소에 나는 자기합리화, 정신승리로 표현되는 애써 좋게 생각하기를 할 줄은 알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여러 번 생각은 했다. 미적거리지 않고 바로 병원에 가서 다행이다, 의사 말대로 크게 가렵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와인을 마신 게 후회되지만 맥주를 마셨어도 마찬가지였을거다, 기실 아직 몸도 다 회복 안되었다는 뜻으로 알고 자중하자 등등.. 그래도 차마 감사일기라는 제목 밑에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감사일기장 쇼핑은 좀 더 미루고, 그저 불행 중 다행이지 라는 제목 밑에는 이 긴 글을 부려놓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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