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공비행 Sep 14. 2023

축구 응원의 이중성

팬은 상하가 아닌 좌우다.


"거지이면 거지답게 굴어라."


세리에 팀과의 이적 루머가 올라올 때, 흔하게 보이는 팬들의 반응이다. 아, 참고로 이때의 팬들은 보통 한국에서 가장 인기를 가지고 있는 EPL에 대부분이 해당되며, 위와 같은 거친 단어 선택이 아니더라도 뉘앙스의 경우에는 모두가 내포하고 있다.


저런 반응을 보았을 때, 세리에 팬으로서 좋은 감정이 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토론의 자세를 유지한 채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려고 한다거나 똑같은 애티튜드를 드러냄으로써 비난 혹은 모욕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기본적인 이해가 결여된 상태이기 때문.


여기서, 세리에 팀들이 돈이 없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진 않겠다. 


AS로마의 경우로 한정 지어 이야기해 보았을 때, 스타디오 올림피고 경기장 소유 문제, 신구장 건설, FFP 룰과 별도의 UEFA 장부 문제, 그리고 리그 자체적 수익 등 이야기할 수 있는 수치적 요소들은 매우 많으나, 그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면서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의지 내지는 이해하려는 욕구를 지닌 팬들은 매우 적기에. 


그렇다면, 저 문장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번 만큼 쓰세요'라는 취지의 Financial Fair Play (일명 FFP)에 부합하고자 하는 노력 이외에도 부딪히는 수많은 난관들로 인하여, 세리에 구단들의 경우에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선수들을 유럽 전역에서 탐색한다. 


특히 상위 구단의 경우에도, 현 소속팀에서 꾸준한 활약을 이어나가고 있거나 높은 가치 및 급료를 지닌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따라서 이름값은 지니고 있고, 한 때 활약을 크게 했던 적도 있지만 현재 한 풀 꺾인 상황에 놓인 선수 내지는 추후에 잠재력이 폭발할 가능성이 엿보이는 선수들을 주로 찾게 되는 것이다. 이에 EPL과 같이 수많은 자본과 유망한 선수들이 모이는 리그 내에서, 벤치 자원으로 전락하거나 팀의 2부 리그 강등으로 인하여 새로운 1부 리그의 활동 가능한 팀을 찾고 있는 선수들에게 손을 뻗게 된다. 


그 결과, 실제 이적으로 이어지는 경우와 별개로 여러 잉글랜드 구단들과의 루머가 쏟아지게 되고 해당 구단 팬들이 저러한 반응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 반응에는 어떤 이유들이 담겨 있을까? 


앞서 이야기한 '번 만큼 쓰세요.'가 그 이유다. 그 구단 팬들의 입장에서도, 선수단의 뎁스를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고, 아무리 벤치 자원이라 할지라도 본인들이 애정하는 선수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세리에 구단들이 이적 제안을 건넬 때에는 주로 '임대 후 이적' 형태를 띤다거나 매우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자 하는 상황이기에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돈을 많이 낼 수 없다면, 선수를 현재 보유하고 있는 구단의 입장을 충족할 수 없다면 방향을 선회하거나, 쥐어짜서 새로운 제안을 내보이길 바라고 혹은 없는 살림으로라도 알아서 잘 운영하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양측 어느 누구에게도 비판할 수 없는, 타당한 논지로 보인다.


그럼에도 실제 이적이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잉글랜드의 구단들이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이유가 있으니 수락을 하였거나, 기타 자신들만의 이유를 가지고 협상에 임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적 제안을 건네는 것 자체에서부터 세리에 구단들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타당치 않다. 


왜냐고? 새로운 제안, 더 높아진 비용으로 제안을 하거나 혹은 거래를 하지 말자는 취지의 의견은 타당할지라도, 세리에 자체와는 거래를 트지 않았으면 한다거나 "거지라면 거지답게 굴어라'하는 의견은 위 취지에서 더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구단 상황만 놓고 그 안에서 이야기하는, 본인들의 상황으로서만 임하는 '팬'의 자세로서 전자는 타당하고 건전한 비판 및 태도인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상대방 구단 내지는 리그에 대한 존중 결여 및 소통 자체가 부족한 상황인 것. 본인들이 응원하는 구단의 바운더리를 넘어서 외부로까지 뻗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 발생하고 감정이 상하게 되며, 위 문장과 같이 축구팬들 서로의 정신적 영역을 침범하는 발언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해당 구단의 연고지에서 태어나거나 거주하지 않고, 가족 대대로 구단에 대한 충성스러운 팬 생활을 한 것도 아닌 한국에서, 각자가 선호하는 선수 및 감독, 전술과 여러 스토리를 좋아하게 되어 팀의 팬이 된 사람들. 이것이 모두의 상황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경기 내용 및 결과에 대한 소통 및 다툼도 아니고, 이적 루머까지도 서로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상황이 반복된다. 


축구팀의 팬이라는 것 자체는 결코 신분 내지는 지위를 상징하지 않는다. 


그 선은, 끊임없이 지워지고 새롭게 그어진다. 





최근, 사우디 오일머니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태풍과도 같이. 


수많은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중동 지역으로 향하였고, 전성기에 진입하였거나 이제 본인의 이름을 유럽에 알리기 시작한 어린 선수들도 마찬가지의 행보를 보인 경우가 있었다. 


이들 또한, 비판의 대상이다. 자금의 출처, 리그의 수준, 범접할 수 없는 선수 급료의 갭과 선수 개인의 커리어에 대한 걱정 등이 그 바탕이다. 


위에서 길게 이야기한 상황을 뒤집어보았을 때, 기타 유럽 리그들이 EPL을 바라보는 것과 EPL이 사우디 리그를 바라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같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유럽 내에서, 언제나 갑의 위치를 고수하던 EPL의 팬들 또한 사우디의 바람 앞에서는 흔들리는 갈대가 되었다.


90년대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이래로, 긴 시간이 지나 자본과 선수들이 리그에 모이는 상황 속에서 여러 각 리그들의 대표들과 구단 관계자들은 프리미어리그의 횡포에 대해 하소연한 경우도 많았으며, 셀링 리그로 전락해 버린 경우도 빈번해졌다. 이러한 경우들은 현재 상황과 맞물려 보았을 때, 앞으로 사우디 리그가 충분히 반복할 수 있는 상황이며 일종의 미래 예견에 해당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갑의 위치에서,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와 버린 EPL 구단의 팬들은 사우디의 바람에 휘청거리는 순간마다 어떠한 감정을 느끼는가? 


한 가지 경우를 제시해 보겠다. 토트넘의 손흥민 선수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또 그러길 바란다만) 사우디 오일 머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중동의 팀으로 향하였다. 토트넘 팬들의 입장은 어떨까? 


"거지이면 거지답게 굴어라."와 마찬가지로, 사우디 구단이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처럼 급료를 주고, 이적료를 제시해 봐라."


사우디는 아시아고, EPL은 유럽이니 다르지 않냐고? 돈의 논리로 사고파는 입장에서 대륙은 상관이 없으며, 그 모든 선택에는 선수의 의지 또한 반영되어 있기에 팬들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사우디 리그의 수준을 따지며 EPL과 비교하긴 어불성설이라는 것은 현 이야기의 취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구조적으로 상하관계에 놓인 팬의 입장이다.


사우디는 돈의 출처가 의심되지 않냐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만, EPL과 중동의 연결고리 또한 이미 존재한다. 


사우디를 비판하는 수많은 선수들과 팬들의 경우에는, 과거 유럽의 기타 리그들이 EPL을 바라볼 때의 상황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반복된다. 


실로 이중적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부상당해서 필요는 없지만 살 의향이 있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키에사. 

2선 자원이 부족한데 영입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펠레그리니와 디발라. 

이 돈 줄 테니까 선수나 내놓으라는 심보. 


그럼에도 본인의 팀에 뿌리 내린 채 활약을 이어나가는 선수들에게는 쉽게 붙여버리는


'낭만'의 라벨.



그 모든 것들이 역지사지로 본인에게 닥쳤을 때 비로소 사람은 '선'의 존재를 파악하게 되고.




시장의 논리, 자본의 힘과 구단 및 리그 간의 역학 관계 같은 거대한 부분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개인의 입장에서 큰 혼란과 현 상태의 파악의 순간을 겪는다. 


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으로서 알렉스 퍼거슨의 트레블을 함께 하였거나, 레알 마드리드의 팬으로서 라데시마의 순간을 직접 경험하였다면 인생에 길이 남을 순간이자 소중한 추억이 되었을 것이고, 너무나 행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높낮이와 관계되지 않는다. 팬은 신분이 아니다. 동일한 선 위에서, 모든 축구의 구성원들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은 '어느 팀의 팬인가?'이겠지만, 그것은 평면적인 구분선이 되는 것뿐이지, 위아래로 쪼개지는 경우가 아니다.


팬은 상하가 아닌 좌우다.








작가의 이전글 그 당시 '싱가축구'에는 말이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