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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는... 7

찬란했던 20대의 날들이여

by 오로라맘

고도근시 -13,-16 나의 시력이다. 그러니 안경알의 두께는 어떠했을까? 학창 시절 내가 콘택트렌즈를 끼기 전과 후를 사람들은 나를 못 알아봤다. 미운오리새끼처럼 취업을 앞둔 나는 변신을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2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안경을 벗고 렌즈를 착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학교 때에 한번 땜빵으로 미팅을 나가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나온 남학생들의 무언의 눈빛들 웬 폭탄이 나왔냐는 어이없는 표정들 때문에 한번 나간 미팅 이후로 나가지 않았었다. 그러다 렌즈를 착용하고 나서 외모에 부쩍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고3 때에는 방과후면 미팅을 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항상 쇼트커트였던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고 고3취업반이 되니 화장도 할 수 있었다. 서툴지만 나름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그동안 받지 못한 남자들의 관심을 받게 되니 재미있고 신이 났다. 담임선생님의 소개로 나는 학교에서 제일 먼저 취업을 했다. 오퍼상에 경리로 취직을 한 것이다. 작은 염료와 건설 부자재를 수입하는 회사로 직원이 나를 포함 3명인 아주 작은 회사였다. 19살에 첫 직장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지는 않았다. 무지하게 꼼꼼한 사장님이 실수투성인 나를 엄청나게 혼내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로 달려가 눈물을 흘렸었다. 맨날 실수하는 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고 일을 배우면서도 하나도 재미나질 않았다. 그때 그 회사가 남산 초입 회현역 부근쯤에 있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한동안은 남대문 근처는 얼씬도 안 했던 것 같다. 나의 첫 번째 직장은 그렇게 끝이 났다. 고3취업실습이 끝나고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바로 퇴사를 하였고 나는 두 번째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충무로의 광고회사였다. 아주 우연한 기회로 면접을 보고 통과해서 입사를 한 것이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취업하기로 했던 인쇄회사 면접을 보러 가던 길에 면접볼 회사위치를 몰라 지나가는 사람에게 위치를 물어봤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원래 가기로 했던 회사가 아닌 엉뚱한 회사에 합격을 한 것이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이 사장님 이셨고 내가 취직을 하러 온 사실을 듣고 당신 회사 면접도 보러 오라며 연락처를 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하는 데로 흘러가는 줄 알고 더욱더 기고만장해졌다. 이제 갓 20살이 된 호기심 많은 나는 점점 더 나만의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월급을 받으면 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놀고 치장하는데 돈을 다 써버리고 그 시절에 유행했던 유흥업소가 락카페와 나이트클럽이었는데 월급을 받으면 지갑 두둑이 현금으로 채워 넣고는 그 돈이 일주일을 못 넘기게 흥청망청 탕진을 했다. 고생하시는 어머님께는 딸 대학 보냈다 생각하라고 말하고 내가 번돈은 내가 다 쓰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다녔다. 왠지 담배를 피우면 쎄 보일 것 같아 백해무익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한잔만 먹어도 얼굴이 빨갛게 변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알코올분해능력이 없는데도 매일밤 친구들과 유흥을 즐겼다. 돋보기안경으로 남자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내가 화장과 옷빨로 세련되고 예뻐지기 시작하니 남자들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리에서나 집 근처에서나 심지어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어도 남자들이 계속 애프터 신청을 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친구들의 점사를 봐주거나 하면 더 많은 남자들이 꼬였다. 어렴풋이 짐작을 할 뿐이었다. 기를 쓰고 나면 채워야 하는 줄말이다. 그즈음 나의 무분별한 점사남발에 신이 노하셨을까?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신병이 왔던 걸까? 이유 모를 병마가 갑자기 찾아왔던 것이다. 살이 급속도록 빠지며 체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락카페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사귀고 있었다. 그 친구는 나를 만나면서 학업을 게을리하기 하고 집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고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했다. 대학생활은 뒷전이고 등록금을 받거나 용돈을 받으면 다 나를 위해 썼다.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거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사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장소는 우리 집 근처 아니면 내가 일하는 회사 근처로 한시도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어찌 되었든 나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지하철역에서 회사까지 오는 길을 몇 걸음 못 가고 힘들어 쉬는 통에 매일 지각이 생활이 되었고 더 이상 회사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나빠져 두 번째 회사도 퇴사를 해야 했다. 퇴사를 하고 나서 집에서 쉬니 몸이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전에 나는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 두 명의 남자친구가 더 있었다. 고3미팅 때 만난 친구와 취업할 때쯤 만난 친구가 있었는데 미팅 때 만난 친구는 그냥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고 취업쯤 만난 친구는 대학입시준비로 자주 만나지 못하니 외로웠던 내가 이별을 요구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난 남자친구를 만났다. 나의 할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사실 남자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기에 겉으로만 사랑하는 척을 할 뿐 내면은 이기적이고 못된 철저히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도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을까 그래봤자 철딱서니 없는 나이였는데 왜 그런 자만심에 빠져있었는지 모르겠다. 삶에 대한 기대도 없었고 미래에 대한 설렘도 없었고 그냥 되는대로 대충대충 살다가 가면 되는 거지 라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갔다. 무시당하거나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아 진한 스모키화장과 과감한 의상으로 나의 나약함을 숨기고 있었다. 나의 건강이 차츰 회복이 되자 생각을 했다. 앞으로 평생 뭘 해 먹고살아야 할까를 말이다. 경리업무를 배웠으니 계속 이길로 가야 할까 아니면 다른 쪽 일을 알아볼까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벼룩시장을 찾아보고 일자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작은어머니의 소개로 주유소 경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주유소를 2개나 운영하고 계신 돈 많은 사장의 회사였는데 원래 경리언니가 있고 그 언니가 사정상 일을 그만두게 되니 내가 임무를 인수인계받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장의 지독한 사투리속사포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으며 너무나 많은 현금 뭉치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상황 속에서 한 번이라도 실수할 시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세 번째 직장생활도 얼마못가 끝이 났다. 그다음도 작은 회사 경리였는데 한 달 월급을 제때 주지 않아 그만뒀고 다섯 번째 회사는 옷을 만들어 파는 공장에 이였다. 막내고모와 큰고모가 아주 오래전부터 미싱을 하셨기에 나도 그쪽으로 재능이 있나 해서 이번엔 나의 절친과 함께 취업을 하였으나 열악한 공장환경에 얼마 못 버티고 그만두었다. 집까지 찾아와서 일어나오라는 사장 때문에 친구와 같이 벌벌 떨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이 모든 것이 불과 1년 새에 벌어진 일이다. 이제 여섯 번째 취업이다. 이번엔 새벽시장에서 도매로 옷을 파는 곳이다. 이곳은 고등학교 친구가 소개해준 곳으로 자기가 다니는 교회집사님의 가게라 했다. 지독한 악덕업주였던 여자사장으로 기억한다. 선한 종교인은 없는 것일까? 낮밤이 뒤바뀐 상황에 밤낮으로 일을 시켰던 아주 못된 어른의 표본이었다. 그래도 그 덕에 새벽시장이란 걸 알았고 경험해 봤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나의 평생 직업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 당시 남자친구와 여름휴가를 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알아봐야 했다. 나는 번동에서 살고 있었기에 아르바이트할 곳은 집에서 가까운 미아삼거리나 성신여대 쪽이 제법 번화가라 그쪽으로 위치를 정하고 알아보던 중 에꼬미라는 액세서리가게가 벼룩시장 구인광고에 올라왔다. 한 번도 판매알바는 생각해보질 않았는데 순간 호기심이 들었다. 알바면접을 가보니 작고 왜소해 보이는 아주머니와 부리부리 큰 눈을 가진 부부가 운영하는 열 평 남짓한 잡화점이었다. 14k와 실버제품 머리핀과 구슬액세서리 등 등 체인점이긴 하지만 물건의 반이상은 남대문도매시장에서 떼서 파는 곳이었다. 사장 부부는 석유파동 때 번돈으로 성신여대 이 가게를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심사숙고해서 알아보고 차렸다는 것과 어린 아들이 있는데 희귀성난치병을 앓고 있어서 막대한 병원비가 지속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친구도 나를 따라 면접을 보았고 우린 둘 다 이 작은 액세서리가게로 알바를 다녔다. 정직원 언니가 한 명 있었는데 고향은 시골 어딘가라 하는 약간의 사투리를 쓰는 살짝 들창코였던 그 언니를 도우며 일을 했다. 사모님과 사장님이 매일 남대문 새벽시장에서 물건을 떼오면 가격표를 부치고 진열과 판매를 했다. 일을 하면서 그렇게 즐겁게 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하루일과를 마치고 잠이 들면 빨리 다음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게 나가 일 배우는 것이 정말로 재미있고 신이 났다. 정직원언니가 장사하는 모습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며 보석종류와 보석들이 갖고 있는 특징등을 외우고 습득하는 게 신이 나고 재미있었다. 다른 제품들은 시장에서 사입을 해서 팔아도 사입 안 되는 품목이 있었는데 14k 주얼리 제품들은 무조건 본사제품을 써야만 했다. 당시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본사언니가 있었는데 까무잡잡한 피부와 마른 체격에 똑소리 나게 일 잘하는 본사언니가 나의 워너비였다. 본사언니도 나를 많이 예뻐했다. 정직원언니가 휴무일이라 나오지 않은 날엔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며 맛난 것도 사주곤 했다. 당시 엄청 어른같이 느껴지시던 사모님 나이가 30대 초반이었다. 언제나 수수한 카라티와 청바지를 입으셨고 단발머리를 고무줄 하나로 질끈 메고 다니셨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아픈 아들 생각으로 열심히 일만 하신 친절한 사모님이 셨다. 그러다 우연히 정직원 언니가 두 분 몰래 돈을 빼돌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분이 없을 때 물건을 팔면 돈통에 돈을 넣기 전 얼마인지 알 수 없는 돈을 빼고 다 넣지 않는 것이다. 남자친구와 나는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으니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직원언니는 처음에는 우리 눈치를 보며 사장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고 사모님 몰래 빼놔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었다. 두 분의 가게이니 사장님께서 똑순이 사모님 몰래 술값이라도 몰래 빼서 갖고 계시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 하지 않던가? 정직원언니는 우리를 안심시키고 나서부터는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돈을 빼는 횟수와 금액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그 시절엔 CCTV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도둑을 잡으려면 현장에서 바로잡지 않으면 확인할 방법이 없던 시절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정산금액이 맞지 않고 손님들에게 판매한 장부금액과 환불금액의 아귀가 맞지 않으니 사모님께서 투덜거리셨다. 사모님은 사장님을 의심하고 계셨다. 우리는 당연히 사장님이 직원언니에게 시킨 줄 알고 있었기에 직원언니가 쉬는 날 사모님께 사실을 말씀드렸다. 마침 사장님 두 분 내외가 함께 있는 날이었다. 새벽부터 시장 다니면서 장사하시는 사모님 뒤에서 비자금 챙기시는 사장님이 얄미웠기 때문이었다. 나와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두 분은 어이를 상실하셨다. 사장님께서 직원언니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두 분이 그 직원언니가 몇 년을 함께 일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꽤 오랜 시간 돈을 빼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신 듯하셨다. 두 분은 이 사실을 본사 언니에게 알리셨고 그 직원언니는 바로 해고처리되어 가게를 안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여하튼 이 모든 일들이 여름휴가 전에 일어났었다. 사모님과 본사언니는 새로 직원을 뽑아야 했는데 평소 나를 눈여겨보던 본사언니가 사모님께 나를 추천했고 휴가가 끝나면 직원으로 합류하기로 약속을 했다. 남자친구와 신나게 여름휴가를 즐기고 정식 출근하는 날이었다. 오픈시간에 맞춰 우리는 가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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