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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제 Mar 17. 2023

0. 드루이드 엄마와 살식마 딸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 댁에서 살았다. 작은 마당과 뒤뜰이 있는 집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식물을 좋아하셔서 마당에는 화분을 여러 개 두셨고, 뒤뜰에는 큰 나무와 다양한 화초를 기르셨다. 지붕보다 훨씬 높게 솟았던 오동나무와 맛있는 열매가 잔뜩 열렸던 무화과나무, 다치거나 하면 으레 끊어다 발라주시던 알로에가 큼직하게 심긴 화분, 다양한 제라늄, 영산홍, 툭하면 빨아먹었던 샐비어. 뭔가 참 많았는데 너무 옛날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을 가득 채우면 들기 버거울 정도로 커다란 물뿌리개를 들고 할아버지를 쫓아다니며 물을 줬었던 기억만은 아직 생생하다.


개인적으로 제일 신기했던 식물은 무화과였는데, 충청남도에서도 북쪽인 서산에서 나무가 커다랗게 자랐다. 바다가 가까워 겨울이 춥지는 않아서 아슬아슬하게 월동이 되지 않았나 싶다. 무화과 열매가 열릴 때쯤 되면 언제 익나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무화과나무를 심었을 때는 우리 가족은 이미 분가해서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댁 갈 때마다 나무를 한 번씩 꼭 들여다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열매를 일찍 따면 덜 익고 늦게 따면 개미가 다 먹어치우고. 나중에는 나무가 담장 너머로 손 내밀 정도로 크게 자라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구 따먹었다고도 했다. 시판하는 무화과 열매를 사서 먹어보면 그 맛이 나지 않는다. 개미가 엄청나게 꼬일 정도로 달큼했었다.


엄마는 분가해 나온 아파트 베란다에 작은 화분을 키우셨다. 민트나 타임, 로즈마리 같은 허브들이 몇 종류 있었고, 제일 많았던 건 바이올렛이었다. 옹기종기 꽃이 핀 애들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기르셨다. 나는 바이올렛보다는 허브가 좋았다. 특히 레몬향기 퐁퐁 나는 레몬타임이랑 레몬버베나. 이때 내 눈에 들어서 그 뒤로 내 손에 제일 많이 죽은 애들이기도 하다.


고등학생 즈음 엄마는 이사를 한 번 더 하셨고, 이때부터는 베란다가 정말 온실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다육이들을 키우기 시작하신 것도 대강 이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자잘한 화분들이 마구 늘어났다. 역시 할아버지 딸인가, 이런 생각을 언뜻 했던 것도 같다. 이때는 집에 가뭄에 콩 나듯 들러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빠의 정년퇴임을 앞두고, 두 분은 이제 전원주택을 알아보시다 결국 외진 곳에 조성된 전원주택단지에 들어가셨다. 주변에 편의시설은 전혀 없지만 약 15 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작고 예쁜 곳이다. 아빠 정년퇴임에 맞춰 조금 일찍 퇴직하신 엄마는 드디어 생겨난 정원을 구석구석 가꾸는 데 푹 빠지셨다. 갈 때마다 각종 소담한 꽃들이 늘어났고 장미 아치까지 생겨났다. 나는 친정에서 할미꽃을 처음 실물로 봤다. 어버이날에는 마당에 심으시라고 수국 화분을 선물로 드렸더니 수국 덤불로 키워내셨다. 그 뒤로 정원에 수국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키우시던 다육이들은 따뜻한 창고와 간이 온실이 된 발코니에 가득 자리 잡았다.

분명히 시작은 꽃대 두세개짜리 화분이었는데...
담따라 쭉 늘어선 각양각색의 수국들. 종류별로 데려다 심어두셨다.

아무리 봐도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드루이드의 피를 물려받은 게 분명한데, 나는 어쩌다 살식마가 되었나. 탄식하듯 적었지만 사실 게을러서 물 말려 죽인 게 대다수이다. (이쪽은 엄마보단 아빠의 성격에 가까우므로 아빠를 닮은 것을 탓해도 되겠지?)

그 쉽다는 민트를 말렸다 물 줘서 살렸다 여러 번 반복한 끝에 기어이 쓰레기봉지로 보내버리고, 타임이나 버베나야 말해 뭐 해. 지금까지 제대로 키운 식물이라고는 깻잎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머나먼 타지인 핀란드에서 깻잎을 먹지 못하면 죽을 것 같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키워낸 애라 한국에서는 다시 못 키울 것 같다. 와중에 옆에서 같이 키우던 방울토마토는 제대로 맺은 열매 없이 골로 가셨다. 작년에 베란다에서 키우던 오이는 고작 하나 따먹고 두 번째로 열린 오이를 넝쿨채로 말려 죽였고, 겨자씨는 파종했다가 벌레의 습격에 질겁해서 통으로 갖다 버렸다. 심지어 아들이 어디 이벤트에서 얻어온 다육이(양로)까지 무관심으로 초록별에 보내버렸다. 나는 죽으면 식물지옥에 갈지도 모르겠다.....ㅠㅠ


베란다와 다용도실이 각각 남동, 남서향인 다소 애매한 집에 살고 있었는데, 올 초에 어쩌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남남서향의 따끈따끈한 집이다. 베란다가 다소 좁기도 하고 워낙 여러 애들을 말려 죽인 터라 화분은 들이지 않기로 하고 절화나 사다가 장식했는데, 히아신스 수경재배를 보고 또 식물 뽐뿌가 막 올라왔다. 수경이니까 괜찮겠지? 질러! 하고 정말로 저질러버리니까 원예고수 친구들이 달려와서 구근 관리법을 알려준다. 그러더니 은근슬쩍 화제가 다른 식물로 옮겨가게 되는데...


봄에는 애니시다지! 향기가 진짜 좋아. 장미허브는 어때? 키우기 쉽고 얘도 향이 좋아. 야자를 수경재배하다 냥이가 다 뜯어놔서 캣그라스를 키웠어. 칼라데아가 참 예쁘더라.

분명 머릿속에서는 더 이상의 살식은 안된다는 외침이 울려 퍼지는데, 손은 스윽 차키를 집어 들고 발은 집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결국 장미허브를 한 포트 들이고, 애니시다는 없대서 그다음 주에 다시 가서 사 왔다. 다용도실에서 묵어가던 귀리를 파종하고 급발진해서 프로개님 블로그 참고해 가며 아몬드까지 심었다. 지나가던 다른 꽃집에서 기어코 다시 레몬버베나를 사 왔다. 머리 깎은 대파까지 네 대 물에 담가서 베란다에 내놓고 다이소에 가서 이것저것 잔뜩 쇼핑을 했다. 친구들은 영업 성공을 매우 기뻐했다 하하.. 그래 너희가 좋으면 나도 좋아.

베란다 원예코너
원예고수 친구의 소감 한 마디

결국 유혹에 장렬하게 지고 말았다. 남남서라 볕도 좋고 나도 모처럼 의욕이 생겼으니 이번 애들은 제발 죽이지 말고 제대로 키워야지 싶어 온갖 유튜브와 블로그를 뒤지는 중이다. 햇빛이랑 바람이 중요하대서 점심쯤부터 일몰 전까지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두기도 한다. 요즘 voc가 좀 줄어든 느낌이라 환기를 게을리했는데 덕분에 부지런해져 다행이다. 미세먼지와 송홧가루는 일단 나중에 고민하도록 하자ㅠㅜ


아무것도 모르고, 함께 살아온 반려식물도 없었던 식초보지만 마음만은 열정이 넘친다. 앞으로 과연 이 작은 베란다 화단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생각나면 찾아와서 끄적여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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