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죄의 형벌과 선처
선서 거짓은 없을 것이며, 정적 따위는 없을 것이며
쓰려니까 또 막막해진다.
어느덧 스물일곱이 된 나는 이곳에만 오면 스무 살 그맘때로 돌아간 것 같다.
할머니가 계신 추모공원, 추석에 누리지 못한 뒤늦은 휴가를 빌려 이곳을 혼자 방문하게 됐다. 7년 전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때를 생각하고 생각하다 지쳐 이제는 기묘한 형태의 감사함을 느낄 지경이 되었다.
청소년 때 나는 언제나 불필요한 생각들, 막연한 걱정 속에서 피어나는 허상 같은 불길함을 앞으로는 끌어안고 뒤에다 업은 채 살아왔다. 스무 살이 되고 그래도 대학 입학이라는 인생 첫 번째 성과를 거둘 그날에 나는 ‘시한부’라는 단어만으로 정신이 마비되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그때 내가 겪은 일련의 상황들과 걱정은 죄다 허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나는 그 고통을 다른 생각들로 회피해 버릴 수도 없었다. 무력했던 내가 그때 할 수 있던 일이라곤 정말로 우는 것뿐이었다. 무엇을 원망해야 할지 몰라서 존재하리라 믿지도 않는 신까지 원망해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불가항력에 대한 무력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뿐이었다. 말 그대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그렇게까지 해도 탈수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긴 정도로 울었다.
나는 아픈 할머니 곁에 가장 많이 있던 사람이었건만 정작 임종 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점, 미루고 미뤘다가 할머니를 떠나보낸 이틀 후에 모든 것을 토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점, 내 인생 최악의 후회 거리가 이렇게까지 비정한 방식으로 생겨난 데에 대한 분노, 그땐 이걸 설명할 길마저 없어 우는 것밖에 못 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할머니께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죗값을 그날의 눈물로 치렀다고 여겨왔다.
으레 운다는 행위에 있어선 ‘뭘 잘했다고 울어’라는 행위 자체의 죄책감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래도 그날 나는 일종의 권리를 부여받은 셈이었다고 이제야 생각한다. 그날의 나는 누구보다 가장 힘들었겠지만 그런 내색조차 못 할 정도로 바빴던 엄마의 몫까지 대신 눈물 흘릴 수 있었다. 이 뒤늦은 시점에서 그날을 다시 마주한 나는 이마저도 일종의 감사라고 표현한다. 사실 그 감사라 하면 분노와 절망감이 아주 많이 뒤섞인. 그래도 그렇게까지 다른 어떤 것도 떠올리지도 못하게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했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본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했던, 토해냈던, 유례없던 날이다. 무의미하게 심연으로 파고들어 제 발로 밟아버린 구정물 같은 허상이 아니라 언젠가는 건너야만 했던 길이었다. 모든 상황이 현실이었기에, 당장 목놓아 울어도 된다고 허락받은 듯한 유일한, 최초의 날이었다.
이번에 우리 할머니 자리 바로 아래에 있는 또 다른 칸이 눈에 띄었다. 이름 모를 어린아이가 붙여 놓은 편지가 있었다. “할머니 사랑해요” 왜 나는 7년이 지났는데도 이런 말, 이런 단어를 마주하는 데 힘이 부치는지 모르겠다. 어이없게도 나는 마음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긴 아직도 서툴다. 할머니를 향한 미안함과 스스로를 향한 가책이 뒤섞여 결국엔 또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제 울지 않고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방문했지만, 아직은 글렀다.
왜 나는 버거울 만큼 사랑받았으면서도 언제나 무심했을까? 그 무심함의 형벌은 언제 어떻게 쏟아질지 모르는 눈물이고 머리가 으깨질 듯한 편두통이고 평생의 후회가 됐다. 나는 사랑하면서도 표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이게 죄라고 생각했다. 표현의 부재는 여러 문제를 만든다.
나는 할머니가 나를 그다지 아끼지 않는다는 불결한 생각이 컸다. 자아가 비대해져 생겨버린 그 불결함은 앞으로도 나를 챙겨 주지 않았으면 하는 심술로 변하게 됐다. 그나마의 관심도 나를 위한 게 아니라 평생 가족을 보살피며 살아온 습관과 강박 때문일 테니까 관심을 덜 주기를 바랐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심술은 부렸어도 좋은 마음은 표현하지 않았다. 받는 것 자체를 꺼렸다. 하지만 사춘기가 끝나지 않은 듯이 심술부리던 어느 날의 나는 할머니에게 어떤 마음을 표현 받았고, 그날로 구원받았다. 그날의 대화부터 장례식 날까지는 1년 남짓이었다.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보냈던 1년여의 날들은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한다.
그동안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건 죄였다. 표현이라는 게 어렵다고 피해 다녔을 때의 죗값은 크다. 기회가 주어질 때 할 수 있는 작은 표현을 못 해내면 나중에는 별짓을 다 해도 소용이 없다.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았을지 가늠하는 것마저 형벌이 된다. 나중에 나는 불현듯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채 주었기를 빌고 또 빌어야 한다. 손톱을 물어뜯는 것만큼 의미 없는 속앓이지만 수습하지 못하면 결국엔 나를 무너뜨리는 습관이 된다. 내가 이런 순간마다 울게 되는 진실한 이유는, 나와 우리 할머니가 서로 비슷한 정도의 온정을 주고받았었는지 도저히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과 지금의 나는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그래도 아주 많은 일을 겪었다. 봄이 오자마자 이런 일을 겪어버린 스무 살의 나는, 아는 것이라곤 거듭되는 절망밖에 없어 희망을 품는 방법조차 몰랐다. 그래도 7년이 지난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 나를 만들어가자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나는 이제야 이 감정을 분별할 능력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도록 사랑한다는 입바른 소리 하나 서툴러 하는 내 모습은 아직도 치료되지 않은 고질병이다. 그게 꼭 말이 아니어도 좋으니, 내가 먼저 주저 없이 표현하는 법을 체득해야 한다. 내가 표현할 줄 모르면 상대방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과 보살핌이었다는 것도 모른다.
나는 우선 할머니를 늦게라도 혼자 찾아뵌 행동마저도 하나의 마음이었다고 나를 다스려야만 한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다. 살까 말까 수도 없이 고민하다가 결국엔 사 붙인 작은 목화꽃다발,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기억을 한 달 동안 끄집어내서 써 내리는 이 글마저 다 표현이다. 이제라도 바꿀 수 있는 건, 어릴 때보다 조금은 더 표현할 수 있는 나의 태도. 그래서 나는 이 뒤늦은 표현을 형벌이 아니라고, 늦게라도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을 배운 과업이었고, 앞으로 주어진 과제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앞으로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 마음을 먼저 표현해야만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서툰 표현방식까지 알아차려야만 한다. 오히려 이건 쉬울 수 있다, 내가 여지껏 그래왔으므로. 어찌 됐건 다들 이별해야 한다. 상대가 나를 덜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없다. 있을지언정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부류의 사람이다. 오래 볼 수 있는 사이는 조금이라도 더 길게 볼 수 있도록, 그렇지 못하는 사이는 여한 없이 서로를 추억할 수 있도록. 죽어라고 되새기겠다. 분하지만 이것 또한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걸 굳이 요가에세이 올리는 곳에 쓰는 이유는, 요가의 지시가 몸과 마음이 하나 되라는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