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길 위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들
웅장한 파도처럼 산에 걸려있던 구름들과 일출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옆에 있던 조그만 푸드트럭이 눈에 들어왔고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 일찍부터 자신의 여정을 향해 걸어가는 수많은 여행자들을 위해
그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 따듯한 음료와 음식을 준비한 여사장님은
반갑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시키던 도중 아래에서 인기척을 느낀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고
그곳에는 여사장님과 함께 출근한 강아지가
나의 다리에 기대어 한껏 자신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한참을 쓰다듬다 나온 아메리카노를 들고
조심스럽게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자
강아지는 쫄래쫄래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은 나를 바라보고 있던 강아지의 마음을 알았는지
사장님은 나의 의자 옆에 강아지를 올려주셨고
이내 나는 웃으며 강아지를 쓰다듬길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새 강아지는 자신의 앞 발을 나의 허벅지 위에 올린 채
온몸을 나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장님은 자신의 강아지에게
"베스트 프렌드가 생겼네!"라며 웃으셨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길 위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충분히 재정비를 마치고 여사장님과 강아지에게
아쉬운 작별인사를 남긴 뒤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올라온 우리의 앞에는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난히 가파른 내리막 돌길에 휘청거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어느새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의 뜨거운 햇살이 더해져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사진 내리막 아래에는 조그마한 마을이 보였고
언덕 중턱의 벤치에 한 남자가 마을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인기척이 들렸는지 우리 쪽을 한번 쳐다보고
서로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그는 잠시 미소를 띠는가 싶더니
내 다시 자신만의 세계에 잠겼다.
분명 마주한 잠깐의 시간 동안 그의 얼굴에서 미소를 보았지만
그의 차분하고 고요한 뒷모습에서는
무언가가 그를 바닷속 깊은 곳까지 끌어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걱정이 되었다.
방금 걸어온 내리막 돌길에서의 힘듦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가 어디서 왔는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자신만을 시간을 잘 갖고 다시 힘을 냈으면 하는 마음에
조용히 그의 뒤를 지나가며 마음속으로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 '당신의 근심과 걱정은 길을 걷는 동안 길 위에 내려놓고 갈 수 있길 바래요.
그리고 마침내 여정의 끝에서는 그늘에서 나와 가벼운 마음으로
따듯한 햇살을 실컷 머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후 몇 개의 마을을 지나 26km를 걸어 폰페라다에 도착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폰페라다가 아닌
그곳에서 23km 정도 더 떨어져 있던 빌라프랑카였다.
폰페라다를 진득하게 구경하지 못하는 것과
걷지 못하는 23km의 길이 눈에 밟혀
아쉬운 마음은 더없이 커져갔다.
물론 혼자 걷는 까미노 길이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걸어갔겠지만
이미 지난 길에서 배운 것들이 있었기에
나의 욕심만을 생각한 채 이기적인 결정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폰페라다의 터미널에 들어가 표를 구매하고
빌라프랑카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버스에 몸을 실으니
포근함이 밀려와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다행히 깨어 있던 동원이가 급하게 나를 깨워
우리는 무사히 배낭을 챙긴 뒤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10여 분을 걸어 도착한 알베르게는 조용하고 깔끔했다.
체크인을 마친 뒤 쎄요까지 찍고 샤워를 마친 우리는
마을에 있는 계곡에 가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시에스타(Siesta)*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의 상점들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고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의 발걸음만이 거리의 공허함을 채워주고 있었다.
시에스타(Siesta) :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등 열대지방의 낮잠 시간
마을을 돌아보던 도중 고요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성당으로 향했고
마당과 어우러진 성당의 모습은
밖에서 바라본 모습보다 더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굳게 닫혀 있어 성당 내부로 들어가진 못했지만
옆 게시판에 '산티아고 축일'이라며
오늘 7시에 근처 성당에서 미사를 진행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정확한 위치를 알고 싶었던 나는 급하게 휴대폰 지도를 킨 뒤
마을 구석구석을 찾아보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어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때 성당의 옆 문을 열고 나온 아주머니께서 나오는 모습을 발견하곤
아주머니께 달려가 자초지종을 설명드리자
흔쾌히 직접 지도에 검색해 찾아주셨다.
나의 감사 인사를 들으신 아주머니는 웃으며
이따 성당에서 보자라는 말을 남긴 채 함께 성당을 빠져나왔다.
이후 닫혀있던 마트의 모퉁이에 앉아 마트가 열리길 기다렸다
간단하게 마실 음료와 납작 복숭아를 사들고 계곡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넓었던 계곡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시에스타 때문이 아니라 계곡에 있어서 마을에 사람이 없었나 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사람들이 많은 초록의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아 사온 납작 복숭아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안에 가득 퍼지는 달콤한 복숭아와 스쳐 지나가는 바람,
자유로운 복장으로 태닝과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시금 외국에 있음을 실감했다.
숙소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슬슬 미사가 시작될 시간이 되어 동원이와 함께 성당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초 두 개를 산 뒤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조금 앞줄에는 아까 성당의 위치를 알려주신 아주머니가 앉아계셨고
눈이 마주친 우리는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었다.
평소와 같은 미사가 이어진 뒤 산티아고 축일을 기념하기 위한
행렬이 시작되자 성당에 모인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행렬을 따라갔다.
모든 행사가 끝이 나고 초에 불을 켠 뒤 오늘 하루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과 내일도 무사히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성당을 나오자 홀가분해진 마음과는 다르게
허기진 뱃속은 빨리 음식을 내놓으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식당으로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마시며 그렇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