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루엔과 라우라와의 첫 만남
까미노를 걷는 방식은 다양하다. 내가 출발한 프랑스 생장 루트를 통해 걸을 수도 있고, 포르투갈 루트를 통해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휴가 기간마다 까미노로 돌아와 이전 길을 이어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순례자 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산티아고 대성당을 기준으로 100km 이상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100km 언저리에 위치한 사리아에서 합류를 하는 순례자들도 흔히 볼 수 있다.
확실히 사리아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거리에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각자의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길은 더욱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나의 입이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올라, 부엔 까미노!(Hola, Buen Camino!)"를 외치며 서로의 길을 힘차게 응원하고 있었다.
루엔과 라우라를 처음 만났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통 간단한 인사만 나눈 뒤 다시 각자의 길에 집중하며 걸어 나갔지만 인사를 나눈 뒤 라우라는 먼저 우리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쏟아냈다.
- "이름이 뭐야? 어디서 왔어? 한국어로 인사는 어떻게 해?"
파워 E인 게 분명했다. 대화를 나누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스테판에게서 보았던 긍정파워를 루엔과 라우라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루엔과 라우라는 팜플로나 성당의 아이들과 함께 사리아에서부터 까미노를 걷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어! 우리 팜플로나에서 산 페르민 축제 즐겼는데, 팜플로나 너무 좋았어!"
반가웠다. 나의 기억 속에 팜플로나는 산 페르민 축제를 즐기며 열정적이고 즐거웠던 순간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간의 대화를 마친 뒤 또 보자는 인사를 남긴 채 각자의 까미노 길을 걷기 시작했고, 몬테르소에 도착한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식당에 들어가 대구탕과 빠에야를 주문했다. 너무 큰 기대를 했던 탓일까. 생각보다 평범했던 대구탕을 먹고 나와 2시간쯤을 더 걸어 오늘의 목적지인 팔스 데 레이에 도착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 저녁이 되자 마을의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에 모인 사람들만 봐도 이전보다 사람들이 많아졌음을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사가 끝나갈 무렵, 신부님은 순례자들에게 의미 있는 말을 건넸다.
- "이 길을 즐기세요.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그 순간을 같이 즐기고, 또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즐기세요. 우리는 이곳에서 항상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즐겨라. 이 한 단어가 잔잔하던 나의 마음을 일렁였다. 그 어느 때보다 즐기는 것이 어려웠던 시기였다. 마주하는 순간을 즐기기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음 스텝을 준비하는데 급급했던 한국에서의 일상에 주저앉고 싶은 날들에 지칠 대로 지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큼은 오로지 나의 즐거움과 행복에 집중할 수 있었다.
-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휴대폰만 바라보며 자신이 사는 층에 도착하자마자 쌩 내려버리는 차가운 일상이 아닌,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누고 응원하는 이곳의 다정한 일상이.
- 다양한 사람들과 나눈 대화 속에서 얻은 크고 작은 교훈과 감동들이.
- 옷이 더러워지는 걱정 대신 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아 산들바람을 맞으며 재충전하는 시간들이.
-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을 동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순간들이.
어느새 까미노에서 마주친 수많은 추억들이 모여 있었다. 분명 이곳에서도 한국에서처럼 단순히 산티아고라는 목적지만을 바라보며 걸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었다. 아니, 아마 몸도 마음도 지쳐 일찌감치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며 경험하는 모든 순간들이 아쉬움 가득한 후회로 남는 것보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주길 바랬다. 그래서 남은 여정은 더 단순하게 그저 이 순간을 잘 즐기는데 집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