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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꽃신내꽃신 Apr 21. 2023

김려원의 시를 품은 울산12경 - 9.대운산내원암계곡

원효대사 발자취 따라 걷다보니 세상 근심 다 녹는구나


주말ON   U&U TV   시를 품은 울산 12경     

        

기자명 김려원

입력 2023.04.20 20:45


원효대사 발자취 따라 걷다보니 세상 근심 다 녹는구나


[주말ON-김려원 시인의 시를 품은 울산 12경]

 9.대운산 내원암계곡



하얀 포말을 뿜어대는 대운산 내원암계곡.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대운산 계곡물에 메주콩 씻어 담근 외고산 옹기 장맛 끝내주게 구시대이 아리랑 고래고래 아라리요 쓰리랑 에코에코 아라리가 났네  

-민요 '울산 아리랑' 중에서


   연두 기운 물씬대는 사월 도로변이 철쭉아라리로 흥겹다. 계곡 소리 담을 물병 하나 챙겨 옹기마을 스쳐 지날 때 흥얼거려보는 노랫말.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바가지장단 맞추는 재미가 에코에코 구시다. 며칠째 희뿌옇던 대기가 끝내주게 청명하다. 가까이서 물소리가 창을 두드린다. 구신 된장 한 숟갈 푹 퍼넣었을 매운탕 내음이 파고든다. 엉뚱한 곳으로 들까 봐 염려했는데 대운산공영주차장에 잘 내렸다. 평일 한낮이 무료한 주차장매점 주인은 인상만큼 친절하다. "저어기 대운교 앞 갈림길에서 오른쪽은 차로 오를 수 있는 내원암이고, 왼쪽은 걸어가야 하는 울산수목원 방향입니더." 


 내원암까지는 1.78㎞, 걸어서 30분 거리다. 찻길이 나 있으니 저질 체력인은 편한 쪽을 택한다. 도로 폭이 아슬아슬하다. 왼쪽은 아찔하게 이어지는 계곡, 오른쪽은 산 언덕배기다. 내려오는 차와 맞닥뜨리면? 다행히 몇 군데에 비켜설 자리가 약간씩 있다. 차창을 내리고 느리게, 고갯길 물소리를 듣는 일도 썩 괜찮다. 반쯤 올랐으려나. 구비길에 '명상의 길' 안내판이 서 있다. 내원암까지 10보1배 참회법회길이라 절경을 도보로 감상하란다. 차량교행이 어려워 차량통행과 주변 주차를 금한단다. 어쩌란 말인가. 그대로 가는 수밖에는. 


보현보살을 수호하는 흰코끼리를 닮은 팽나무가 내원암 입구에 우뚝 솟은지 500여년이 흘렀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 내원암 입구 우뚝 솟은 500년 된 팽나무


   사자상 두 기와 돌탑이 나타난다. 옛 대원사 터를 짐작해 보려는데 눈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 옹이들로 뭉친 나무둥치가 코끼리를 닮았다는 팽나무다. 연꽃 모양 다섯 봉우리를 훑어온 바람이 암자의 부처 손길을 지나와 그곳을 어루만진다. 저토록 까칠한 옹이들을 만들어 코끼리 형상을 이룬 까닭은 뭘까. 오백 년 세월 간 저 둥치 속에 말 못 할 사연을 얼마나 품었기에. 봄풀 사이로 얼굴을 내민 양지꽃들이 까마득한 우듬지를 올려다보느라 샛노래져 있다. 세상 근심 다 털어낸 행자승 모형과 하얀 미국산딸나무꽃은 언제부터 팽나무 곁에서 한 방향을 바라본 걸까. 


 영남 제일의 명당이라는 내원암으로 들어선다. 천오백 년 전 신라 원효대사가 마지막 수행장소로 도를 닦아 '도통곡'이라 하는 곳. 스님들은 경전공부에 들었을까. 내 신발에 부딪는 자갈 소리가 귀를 쩡쩡 울린다. 군데군데 줄지어 선 꽃그림기왓장과 장독들. 대웅전 마당의 분홍 겹벚꽃과 철쭉. 바람과 계곡과 산새들 소리. 암자를 빙 둘러싼 연두와 초록 산자락들. 이것이 진정한 경지의 고요일까. 푸른 싹 치솟는 잔디마당같이 정갈한 고요. 신라 때 대원사의 암자로 세워진 절이 어찌 이리 깔끔할 수 있는가. 1925년의 큰불에 사라진 절을 1993년부터 하나씩 세워온 이들이 있어서 지금 나의 즐김이 가능해졌다.  


연둣빛 봄 물결이 가득한 내원암의 전경.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 붉은 철쭉길 따라 만나는 내원암 계곡


   팽나무 주변에서 부부로 보이는 이들이 뭔가를 뜯고 있다. 먹거리가 있었나? 가까이 가보니 쑥을 캔다. "시어머니가 쑥떡과 쑥버무리를 참 좋아해요. 지금 몸이 편찮아서 남편과 함께 왔지요. 절에 종종 오는데 봄이면 여기서 쑥을 캐요. 향이 진하고 깨끗해요." "아까 제 눈엔 양지꽂과 클로버잎만 보였는데 허허. 된장 풀어 넣고 쑥국 끓이면 엄청 구시겠어요." "지금 쑥은 좀 질겨요. 쑥떡을 하기엔 양이 적고. 쑥버무리를 하면 나눠 먹을 수는 있겠네요."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달짝지근한 쑥버무리가 떠올라 침이 꼴깍 넘어간다. 차를 끌고 온 남편을 돌아본 그녀가 쑥 배낭을 챙겨 떠난다. 나는 대운천이 흐르는 내원암계곡으로 차를 몬다. 계곡 너럭바위에서 물장구치는 연인의 웃음이 언덕배기에서 붉게 만개한다. 올라올 때 멈칫한 구비길 안내판에, 올라올 땐 못 본 글귀가 떡하니 붙어 있다. '소욕지족(少欲知足). 괴로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원암 주지'. 적은 것에 만족하라는 뜻 같기도, 발로 걸으면 욕심이 적어진다는 뜻 같기도 하다. 어쨌건 가진 게 적으면 괴로움도 적을 터. 주차장에 다시 차를 대곤 대운교의 왼 방향, 대운천으로 향한다. 대운산내원암계곡은 대운교에서 만나는 내원암계곡과 대운천 두 곳을 이르는 말이다. 인공 벽천폭포의 조그만 물고기들과 폭포수의 굉음에 잠시 빨려들어 본다. 차량통행 차단막을 지나자 화려한 철쭉 길이 펼쳐진다. 철쭉이 피워내는 꽃불의 힘으로 계절은 확연히 변화 중이다. 저 꽃불의 힘이 최고조였을 때 칠순의 아버지는 심장에 타오르는 불을 껐다. 이맘때의 붉은 철쭉은 아버지로 피는 꽃. 막내딸에게 예쁜 꽃만 꺾어 준 아버지에게 나는 매년 자줏빛 벼랑의 꽃을 맘으로 꺾어 드린다.  


고개를 내민 연분홍 철쭉.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자줏빛 벼랑은/ 고삐 쥔 암소를 놓게 하고/ 님이 나를 아니 부끄러워한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헌화가(삼국유사 출전.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바친 노래)  



지난 2019년 말 오픈한 울산시 첫 공립수목원인 울산수목원 전경.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시민들의 오감 행복을 위해 세워진 '울산수목원' 건물이 꽃잎 같고 단풍잎 같다. 건물 뒤로 계곡물 소리가 우렁차다. 자그마한 폭포수가 내리닫는 애기소(작은 못)에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논다. 함께 나들이 나온 아빠의 눈은 아이 모습을 쫓기 바쁘다. 지금은 물놀이에 이른 계절. 아이들은 여름방학을 손꼽을 테지. 지난여름 풍경들이 물소리같이 북적거린다. '국립대운산치유의숲'이 750m 앞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나무를 실은 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오른다. 철쭉꽃을 매단 녹색 기둥의 가로등 여럿이 스쳐 간다. 구룡폭포 풍경을 담은 '울산 12경 대운산내원암계곡' 입간판이 나타난다. 깊은 숲과 맑은 계곡과 반석들을 품은 대운산. 원효의 마지막 수행처인 용심지와 도통골. 수목원과 치유의 숲. 날 좋은 산정상에서 바라보인다는 대마도. 이곳은 바람 이는 숲과 햇살 반짝이는 계곡 사이, 구룡폭포와 박치골, 서어나무와 상수리나무와 단풍나무 울창한 원시림을 지나 대운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계곡물의 흐름같이 천천히 느리게 걷는 '만보길'이기도 하다. 대운산 8, 9부 능선에 만개한 철쭉의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다. '지금이 좋은 날'이라는 이 길의 뜻을, 걸어보면 누구나 알게 되리니. 


사방으로 트인 내원암 계곡의 애기소.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 계곡과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


   너럭바위들이 둘러싼 제법 큰 애기소 앞에 멈춰섰다. 바위틈의 진분홍 철쭉 한 그루가 바람의 뜻을 아는 듯 기운차다. 한 산책객이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선다. "철쭉 색이 유달리도 예쁘네요. 그죠?" "여기 계곡은 물이 맑고 얕아서 물놀이 장소로는 최고예요. 저 애기소는 보기보다 깊더라고요. 우리 애가 혼쭐이 난 적도 있어요. 지난번 눈 내린 날의 하얀 애기소는 얼마나 이뻤는지…." 치유의 숲에 꼭 들러보라면서 그이가 뒷모습을 보인다. 굳이 '치유의 숲' 이름으로 들지 않아도 나는 치유의 숲에 들어 있다. 녹색 산중과 방글거리는 철쭉 행렬, 건강한 다리와 생수 한 병. 그것만으로 족한 길. 달리 어떤 욕심이 일겠는가. 원효가 마지막 수행처로 택한 까닭을 손톱만큼은 알겠다. '국립대운산치유의숲' 노란 건물이 철쭉과 꽃잔디 담장에 둘러싸여 환하다. 쭉쭉 뻗은 굴참나무와 편백나무 숲길은 치유숲길, 명품숲길, 바람뜰치유길, 풀향기길로 나뉜다. 생수 한 모금에 마른 목이 트이듯, 어디를 걷든 근심거리가 사라질 숲길들. 이곳의 치유 프로그램은 예약이 어려울 만큼 인기가 많다고 한다. 프로그램으로 참여하지 않은들 어떠하랴. 계곡과 숲을 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뭐든 내려놓게 되는데.


 주차장 도로변에 세워진 '한국전쟁대운산전적기념탐'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희생 영령들을 호위하는 듯, 철쭉 무리가 가지를 곧게 뻗쳐 탑 양쪽에 늘어서 있다. 경찰관이던 작은할아버지는 6·25 때 북한군의 퇴각길에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한 동료가, 지리산에서 총살당했다고 전했는데 확인할 길은 없었다. 


 20년 전 대운산에 오른 적 있다. 해발 742m라고 얕보다가 눈물 찔끔거린 산행이었다. 그때 쓴 시가 떠올라, 아스팔트 틈에 난 노란 민들레같이 싱겁게 웃었다. 
 

김려원 시인 climbkbs@hanmail.net


오르는 길 알지 못해 내리닫다가/ 보이지 않게 때로 소리를 숨겨도/ 눈빛 닿는 곳 죄다 길이 된다/ 바위에 이끼에 까실한 살갗에/ 흘려놓은 빛마다 눈물이다/ 산 좋은 사람들 더 높이 무릎무릎 꺾어도/ 물은 낮은 곳으로만 얼굴을 두려 한다/ 비탈진 곳 이르러 깊은 맘 만나면/ 먼저 길 떠난 사람 짙푸르게 솟아나/ 뒤따르지 않고는 그리움 배겨낼 수 없어/ 끝 간 데 닿으면 낫지 않을 생채기로/ 눈자위 마를 날 없으리 그런 줄 알면서도/ 그런 줄 알면서도/ 빈 가지 사이 스쳐 닿는 햇살로/ 바위 깎아 제 몸 이룰 때까지/ 젖은 눈빛 젖은 꽃빛 한목숨이어야 하리/ 살얼음도 이미 떠난 산중계곡/ 속앓이 깊은 사람 숨차게 오르다/ 저마다 눈물이 되는 

-졸시 '대운산 계곡은 눈물' 전문


 대운산 철쭉은 변함없이 붉다. 



 김려원 

 news@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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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배○ (hy**) 대운산 내원암 계곡의 시원한 맑은물과 푸르른 숲과 운치있는 전경들을 보며 자연에서 묻어 나오는 작가님의 감상을 느끼면서 그간 지친 심신이 개운 해졌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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