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어떡해. 학교 가는 날이야.”
일요일 밤 12시, 올해 중학교 1학년이 된 아들은 우는 소리를 한다. 지가 신데렐라도 아니고. 친구랑 놀다가 들어와서 밥 잘 먹고 ‘히히호호’ 하며 동생이랑 게임을 하더니, 왜 왜 12시만 되면 저러냐고.
“이렇게 늦게 자면 피곤하지. 그럼, 학교 가는 게 더 싫어지잖아!”
하고 빽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꾹 누른다. 호통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특히,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큰 아들의 말은 그냥 듣는 게 상책이다. 사춘기의 ‘의식주’는 건드리는 거 아니랬다. 밥을 먹든지 컵라면을 먹든지, 이른 시간에 자든지 자정을 넘기든지 꾹꾹 참으랬다. 아이를 먼저 키운 선배맘의 경험에서 나온 말을 믿는다. 하지만, 완전히 내 새끼의 울음에 귀 닫을 수는 없다. 신경이 쭈뼛 선다. 혹여나, 아들이 중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생긴 잠깐의 무기력이 아닌 우울의 늪에 빠진 게 아닌지 걱정이다.
“아들, 왜 학교 가기 싫니?”
“그냥. 중학교 시스템 자체가 싫어.”
그냥 싫다는데 할 말이 없다. 나도 십 대 때 학교가 싫었나. 확실한 건 좋지는 않았다. 학교가 싫을 땐 잠깐씩 도망칠 궁리만 했다. 야자 하지 않고 다른 학교 축제도 가고, 놀이공원으로 나르기도 했다. 그래도, 몸은 살짝이 내뺐지만, 마음을 모두 걷어내진 않았는데. 도시락 까서 같이 먹을 친구도 있었고, 야자를 하지 않고 도망간 일로 바닥에 엎드려서 벌을 받을 때도 혼자는 아니었다. 매는 아팠지만, 같이 씩 웃으며 엉덩이에 묻은 먼지 자국을 툭툭 털어줄 친구가 있었다.
우리 아들, 마음 붙일 곳이 없구나. 지긋지긋한 곳 중에 가장 지겨운 곳이 학교라며 매일 아침 울다니. 마음이 머무르지 않는 곳에 몸이 있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래도 학교는 의미 있는 곳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지극히, 어른의 관점과 부모의 바람일지라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떠날 생각으로 밖으로 서성이다가도 돌아갈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일까. 학교에 정을 주려면 마음 맞는 친구를 사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건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소위, 관계란 코드가 통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그냥 어른의 관점을 대입한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월요병이 있는 직장인이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가 정말 길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주중에 한 번 쉬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주 4일제 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들에게 매주 한 번씩이라도 학교 가지 않는 날을 만들어주면 좀 나을까? 매번 안 간다는 소리는 안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월화만 참으면 수요일 휴일, 그런 조건이면 빡빡한 주간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는 해 줄 거라는 기대해본다. 외모도 닮았지만, MBTI 유형 중 INFP라는 점도 나랑 완벽하게 일치하는 아들에게 그저 ‘나’식의 방법이 통하기만 바랄 뿐이다.
“금요일 쉬면서 엄마랑 홍대에 갈까?”
“엄마, 잠깐만. 찾아볼 게 있어.”
무엇을 찾을까 가만히 지켜보았다. 홍대에 어디 갈 것인지 검색이라도 하나. 잘못 짚었다. 첫째가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학교 급식 표. 아, 금요일 식단이 학교를 통째로 빠지냐, 점심 먹고 나오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였다. 결국, 아들은 급식을 먹기 위해 학교에 갔다. 메뉴가 스파게티라나. 나보다는 좀 더 J 성향이 있다, 약간의 계획을 세울 줄 안다.
학교에 다녀온 아이와 홍대에는 저녁에 가기로 했다. 원래의 계획은 학교에 빠지는 주4일 등교를 만들기 위함이었지만 그게 아니면 어떤가. 그냥 아들과의 데이트도 괜찮지, 싶었다. 오고 가는 길에 학교 이야기도 좀 들을 수 있으니. 나들이 코스는 이러했다. 리스본&포르투 서점에서 고정순 작가님 북 토크에 참여한 후, 식사는 홍대입구역 근처 ‘자크르’라는 식당에서 하기로. ‘자크르’라는 식당도 작년 10월 21일, 고정순 작가님의 그림책 콘서트를 다녀온 후 우연히 처음으로 들른 식당이다. 아이의 표현에 의하면 ‘신기하게도’ 음식이 전부 맛있다고 했다. 본인이 싫어하는 버섯으로 만든 샐러드까지도 좋아서 깜짝 놀랐다는 곳. 물론 우리 아들이 엄마와의 홍대 나들이도 마다하지 않은 이유와 목적은 음식점이었지만, 고정순 작가님을 좋아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북 토크에 같이 가겠다고 할 리가 없다.
한 여름밤의 북 토크, 작가님 이야기에 참여자 모두 눈과 귀를 집중한다. 나는 아이가 탁자 위의 매실차와 타르트를 소리 내 먹을까 봐 자꾸 곁눈질로 본다. 이곳에서 물이라도 쏟지 않을까 염려한다. 무려 중학생이나 된 아들을!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아들은 작가님 이야기를 듣고 있긴 하나 보다. 가끔 눈동자가 커지기도 하고, 살짝 웃기도 하는 걸 보니. 다행이다. 1시간 넘게 얌전히 북 토크에 참여할 정도의 집중력 있는 학생이 되었구나. 아이가 어리나, 나의 키를 넘는 학생이 되나 엄마의 마음은 같다. 장소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할까 봐 노심초사한다. 아이를 위하든, 나의 체면이 먼저이든. 하여튼 자식이란 신경이 쓰이는 존재다. 나의 이런 과한 걱정을 먹고 자라 아이가 혹시 당당함이 줄어들었나. 왜 중학교 생활을 쭈뼛쭈뼛 어색하게 구는 걸까. 누구나 중 1 생활이 낯설기는 할 텐데. 아들아, 너뿐만 아니지 않니. 아이를 탓하는 마음이 살짝씩 올라온다. 아, 나도 그랬지. 나도 어릴 때 학교 밖에서 친구를 만나면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발만 쳐다보는 아이였었지. 엄마의 타박을 여러 번 받았었다. 얘가 누굴 닮았겠어. 나를 닮았겠지.
우리의 최종 목적지, 음식점 ‘자크르’에서 아이가 연신 웃는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게임을 하면서 깔깔거리고, 먹는 동안은 만족해하면서 미소 짓는다. 사장님이 중학교 학생에게도 극존칭을 쓰며, 게임에 관한 이야기로 관심을 보여준다.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잘 아는 어른을 만나 기쁜지 큰 목소리로 떠든다. 내가 할 일은 응당 아이에게 공감을 표현하고, 좋아하는 것을 지지하는 일이다. 쉽지 않다. 게임이라는 알고 싶지 않은 세상을 우리집 1호 덕에 배우는 일에 노력해야 하는 때인가. 물론, 나를 닮은 아이가 나에게는 여전히 큰 기쁨이다. 외모는 당연하고, 성향까지 닮았다. 운동이 싫어서, 발표가 두려워서 학교 체육 대회나 행사 자리에 어떻게 하면 빠질 수 있나 고민하는 것까지. 어쩜 저런 면까지 나를 닮을 수 있나 작게 한숨을 쉬기도 한다. 작게 한숨을 쉬면 다행인가. 요즘은 큰 돌덩어리가 내 맘에 있는 듯, 제발 쿵 떨어지지만 말아라 비는 심정이기도 하다. 주말이 지나가고, 월요일이 되면 나는 아이의 찡그리고 슬퍼하며 “학교 가기 싫어.” 돌림노래를 또 듣게 되겠지. 가기 싫어도 막상 직장에 도착하면 그 일을 잘 해내고 마는 직장인의 월요병 같은 것인지. 상황을 심각하게 인지하고 부모의 개입이 필요한 일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세상과 다른 눈으로 나를 사랑하는
세상과 다른 맘으로 나를 사랑하는
그런 그대가 나는 정말 좋다.
권진아의 ‘위로’를 흥얼거린다. 아들도 노랫말 같은 마음이려나. 나는 나를 본 건지, 아들을 바라본 건지 헷갈리는 시간 속에서 헤맨다. 나의 어제에 아들이 있고, 나의 현재에 우리 아들이 대부분이고, 나의 내일에도 아들이 크게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