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기어코 빛과 어둠이 모든 것을 분절하는 이 영역에 발을 디디게 되었구나. 딸아, 이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주인이 될 순 없단다. 그저 명멸하는 잔상으로 남아 가끔씩 우리가 이곳에 존재함을 드러내는 게 고작이란다. 하지만 슬퍼하지 말고 우리가 찬란한 무대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기억들을 떠올려보자꾸나. 너는 그때의 여행, 그때의 우리를 기억하니?
그때 나는 꽤나 조바심이 많았던 것 같구나. 또래 아이들을 보면 어울리도록 등을 떠밀었고, 거칠게 잡아끄는 어른의 손길을 보면 너에게 호신술을 가르쳤었지. 그림자는 갈수록 길어지는데, 너한테 쥐어줘야 할 것들은 산더미 같아서 떠오르는 대로 쏟아냈던 나머지 네 여린 두 손을 무겁게 만들고야 말았구나. 그러니 내 딸아, 그 물안경을 놓친 것을 자책하지 마렴. 잘못은 오로지 나의 몫이니.
하지만 나만큼이나 너에게도 주어진 시간이 없다는 걸 그때의 넌 알았을까. 지금의 너는 프레임 정중앙에서 한껏 빛나고 있지만 그 시간도 오래가진 못한단다. 낮은 짧고 널 비추는 빛은 쉽게 사그라드니 시간을 소중히 여기렴. 홀로 달빛을 받아 춤추고 있는 날 찍느라 그 시간을 허비하지 마렴. 나의 상처의 역사를 궁금해하는 대신 네가 읽고 있는 책을 이해하는 데에 쓰려무나. 이건 너를 위한 여행이니.
넌 워낙 명민해서 내가 없더라도 스스로를 성장시킬 자극들을 알아서 찾곤 했지. 너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려고 나름 노력했는데 나의 인도 없이도 씩씩하게 나아가는 너의 모습은 내 마음을 벅차오르게 하면서도 그늘지게도 했었단다. 네가 있을 곳이 빛 한가운데라면, 나의 자리는 저 밤바다의 심연이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었던 적이 있었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지. 덩치 큰 어른들과 연약한 몸뚱이를 부딪히며 수구를 할 때, 베란다에서 위태로운 밀회의 혼란스러움을 목격하였을 때, 너는 누구보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잡아줄 사람이 필요했을 텐데.
무엇보다도 나의 초라함이 널 외롭게 만들어버린 것 같아 미안하구나.
그때 같이 무대에서 노래 부르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그때 네가 궁금해했던 내 생일이야기를 퉁명스럽게 말해서 미안하구나.
그때 네가 나를 잡아끌고 생일축하노래를 불러주었을 때, 연약하게 우는 뒷모습으로밖에 화답하지 못해 미안하구나.
하지만 거기는 내 자리가 아니란다. 그러니 너는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어른이 되지 마려무나.
그래도 나는 너와의 여행이 너무 즐거웠단다. 네가 항상 프레임의 변두리에만 위치해 있던 내 손을 잡아끌어준 덕분에 함께일 때 나도 너와 같이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단다. 항상 구석에서 혼자 추던 춤도 너와 함께 추면서 비로소 끝까지 다 출 수 있었단다. 네가 하늘을 나는 대신에 나와 같이 수영하러 가주어서 물살의 품에 다정히 안길 수 있었단다. 내 진심을 알아주렴, 내 딸아. 나는 너에게 넓은 침대를 양보해 주는 것도, 비좁은 프레임을 같이 공유하는 것도, 모든 순간이 행복했단다.
내 기억들을 되짚어보고 있을 사랑하는 내 딸아, 생일 축하한다. 네가 이번에 선물로 받은 이 카메라는 정말 경이롭구나. 너뿐만이 아니라 건너편에 있는 나조차도 아주 선명히 비출 수 있게 되었구나. 하지만 거기는 나한테 어울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알지 않니. 그림자뿐인 저 너머의 세계로 먼저 돌아가 있으마. 옛날의 우리가 되진 못할지라도 기회가 된다면 그때처럼 나와 같이 춤추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