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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브로 Jan 26. 2023

2. 그레타 거윅 <레이디 버드(2017)>

내가 나에게 선물한 이름만큼이나 당신이 내게 준 이름이 소중해졌어

그래.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어. 당신은 나는 모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걸.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여러 상황성에 묶여있는 사람이며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나도 가끔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어. 말만 앞선 게 아니고 만약 내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당신도 기뻐할 줄 알았어. 적어도 내가 나의 꿈을 얘기할 때는 아무리 황당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나를 응원해 주길 바랐어. 하지만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나를 지키기 위해서 같은 말만을 내뱉었어. 어차피 너는 세상에 가려질 거라고.


그때부터 나 이외의 세상을 무시하기 시작했던 거 같아. 세상이 나에게 부여해준 이름마저 버린 채, 나는 언제나 옳다는 신념 하나만을 지키는 데에 매달렸던 거 같아. 주변의 의견에는 귀를 가리면서 나를 지켜왔어.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하고자 했어.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해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당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거 같아. 세상의 시류와 상관없이, 나는 언제나 내가 희망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싶었어. 그렇게 살아오면서 성취와 좌절이 반복되는 일희일비의 순간들이 오고 또 사라졌어. 그러한 순간들의 감흥을 오래 맛볼 시간은 없었어. 나는 항상 만족하지 못한 채 내 앞에 놓인 것들에만 시선을 맞추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그토록 목표하던 걸 이뤘던 어느 날, 난 당신이 그것 때문에 울고 있는 걸 보았어. 당혹스러움도 잠시였고 처음에는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올랐어. 당신은 내가 행복해지는 꼴을 죽어도 못 보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당신이 나를 위해서 울고 있었다는 것을 점차 이해하게 된 순간, 나는 여태까지 해보지 않았던 생각을 하게 되었어. '내가 바라는 나'는 무엇으로 만들어야 빚어지는지가 아니라, '지금의 나'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를.


그동안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훼방을 놓는다고 생각해 당신을 증오해 왔던 나였지만, 그런 나조차도 당신의 섬세한 손길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끝끝내 부정할 수가 없었어. 마찬가지로 내가 그토록 무시하고 싶었던 세상도 의심의 여지없이 나를 양육해 온 고향이자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이었어. 당신이 속한 세상에 의해 만들어진 내가 세상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지난 몇 년간 나는 이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 사실이 너무 잔인하고 너무 무서워서 계속 나 자신에게만 매달려왔던 거야. 그렇게 몇 년 동안 받아들이기를 미뤄온 탓에 나는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어. 그날, 나는 내가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것이 때론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하루는 낯선 거리를 정처 없이 떠돌다가 예전의 나였으면 발도 디디지 않았을 오래된 성당에 들어가 보았어. 걸음걸음마다 신을 증오하며 보냈던 나날들의 기억이 밀려들어왔어. 신이 대체 뭐길래 태어날 때부터 나를 규정짓고 내가 무언가를 하려 할 때마다 내 앞을 막아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그날 들었던 찬송가는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어. 어쩌면 이 세상에는 신이 정말로 있고, 단지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제야 나는 나의 앞에 펼쳐져있는 외부적인 의지로서의 세상에 눈을 돌려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어. 현실과 타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내가 나의 꿈을 좇는 과정에서 나와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를 덜 받게끔 하기 위해서.



편지 잘 받았어. 모든 부분이 맘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이번에도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은 당신이었다는 게 참 고맙고 미안했어. 사실 나는 아직도 납득이 안 가는 것들이 많아. 다 나를 위해서 그런 거였다는 당신의 글들을 예전보다는 더 이해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필요했을 때에 당신의 지지가 부재하였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해. 우리 사이의 이 간극은 어쩌면 영영 치유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이 내가 스스로에게 지어준 이름이 맘에 든다고 해주었듯이, 나도 이제는 당신이 내게 지어준 이름이 소중해졌어. 이제부터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안팎으로 걸어 나가다 보면 나뿐만 아니라 당신에 대해서도 더 많이 배울 수 있게 되리라 믿어.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땐 '내가 바라는 나'를 떠올리고, 힘이 들 때엔 '당신이 만들어준 나'를 떠올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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