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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브로 Jan 25. 2023

1. 왕가위 <화양연화(2000)>

그 시절의 재현은 실패해 버렸다. 그러니 시간 밖으로 피신시켜 둘 수밖에

두 방은 서로 벽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 그 위치도 방의 주인들도 매우 닮아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들이 흘러들어올 때도 있었다. 이삿날에는 남의 잡지가 잘못 전해졌고, 성대한 저녁을 먹는 날에는 이웃집 사람들이 자연스레 찾아오기도 했다. 그 사람도 처음에는 그렇게 나의 사랑이 아닌 타인의 사랑으로서 내 방에 발을 디뎠다.


두 사람은 어느 날 동시에 사랑의 끝을 맞이하게 된다. 그 사람이 준 핸드백, 그 사람이 사준 넥타이, 나만이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한 옛사랑의 비밀들은 이미 도처에 흩뿌려진 상태였다. 그 비밀들이 어떻게 새어나갔을까 하며 애인의 불륜을 먹먹히 연기해보려 해도 울분을 삭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아직은 이 사랑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 마침 서로의 옆에 완벽한 대역도 있겠다, 두 사람은 과감히 도 각자가 열렬히 사랑했던 시절을, 서로의 '화양연화'를 재현해 보기로 마음먹는다.


그 남자는 나의 남편을 연기하고, 그 여자는 나의 아내를 연기한다. 식당에 들르면 서로의 배우자가 주문했던 것을 똑같이 주문해보기도 하고, 이전보다 서로의 공간을 자유로이 드나들기도 한다. 어느 날은 갑작스러운 이웃의 방문으로 인해 며칠씩이나 방에 갇혀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원래부터 그 자리가 내 자리였던 것 마냥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연기를 더욱 완벽히 만들기 위해 그 남자의 부인이 신었던 구두를 집에 들고 간 적도 있었다.


두 사람은 그래도 알고 있다. 아무리 이것이 연기라고 우겨봐도, 주위 사람들은 납득하지 않을 거란 점을. 모든 것을 냉정하고 공평하게 비추는 시간마저도, 그들이 재현하는 화양연화가 설 자리를 축소시키며 더욱 궁지에 몰아놓고 있었다. 한 번은 자신들의 옛 배우자와의 연을 공식적으로 청산하기 위한 연습으로 연기를 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불어나는 눈물로 인해 연기를 끝마칠 수는 없었다. 왜였을까? 이건 그저 연기에 불과한데.


그때의 눈물의 의미를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볼성사납게 그 사람과의 이별이 임박해 온 순간 알게 되었다. 화양연화란 재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연기해 오던 옛사랑의 모습은 내 눈앞에 실제로 있는 사람의 모습에 의해 덧칠된 지 오래였다. 아무리 서로의 연기가 완벽하게 떨어져 그때의 설렘과 벅참을 느꼈을지언정, 그것은 새롭게 덧칠된 화양연화지 자신들이 그렇게 그리던 그 시절이 될 순 없다. 그 사람과 이별연습을 할 때에도 결국은 실제가 연기를 압도해 버려서 같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때 흘린 눈물은 연기 때문에 나온 게 아니었다. 정말로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과 영영 끝이 되어버릴까 봐 두려움에 흘린 눈물이었다. 그렇게 나는 두 번씩이나 화양연화를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내 옆에 자리가 생긴다면 올 것인지, 그 이는 언제 한 번 나지막이 제안해 본 적이 있었다. 실제로 나는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바뀌어버린 풍경에 현기증이 일었다. 서로에게 친숙했던 홍콩은 낯선 싱가포르의 공기에 의해 대체되어 있었고, 서로 형제와 다름없이 긴밀하게 지냈던 집주인들은 홀연히 떠나버린 후였다. 그제야 내가 이곳에 온 건 그 사람과 함께하고자가 아니라, 이 오랜 연기를 끝마치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인 양, 나는 오래전 내가 가져갔던 구두를 돌려놓고 연기자로서의 자리를 내려놓은 채 그곳을 떠났다.




아직 마지막이 남아있었다. 무정한 시간에 의해 점차 희미해지고 쇠약해진 화양연화는 아직 나의 몸에 먼지가 낀 것처럼 남아있었다. 나는 그것의 장례식을 치러주기로 하였다. 우리가 함께했던 장소와 가장 먼 이국의 땅에서, 나는 그것이 더 이상 시간에 의해 살이 깎이는 고통을 겪지 않도록 그것을 풀어주었다. 이제 그때의 추억은 나조차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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