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겪은 일이다. 새로운 부서장 Y와 일하게 된 지 한 달 만이었다. 그는 내가 이혼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기 둘째 딸도 은우보다 한 살 많다며 '나도 애아빠예요. 육아 관련해서 대충 상황 이해한단 얘기예요. 급한 일 있으면 편하게 말하세요.' 했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이 참 고맙고 유연한 부서장을 만나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는 애아빠이기 이전에 남자였다.
사건은 3월 어느 늦은 오후에 벌어졌다. 사무실 가운데에 놓여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Y와 네 명의 남자직원이 둘러앉아 있었다. 나는 내 자리 책상의자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자리 배치상 테이블을 향하고 있었지만 파티션과 모니터에 가려 서로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회사 근처 단골 카페에 새로 들어온 젊고 예쁜 점원 아가씨 이야기를 하며 20대 중반의 젊은 남직원에게 어떻게 잘해보라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농담과 부러움이 섞인 대화가 오가다 이제 각자 자리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때였다. Y가 불쑥 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엊그제 내가 언니버서리 씨한테 몇 년생이냐니까 85년생이라고 하면서 서른아홉인데 만으로는 서른일곱이라고 하더라."
이름이 들리자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가 쫑긋해졌다. Y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근데 솔직히 아홉이나 일곱이나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 다 끝.났.는.데."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끝났어? 뭐가?부서장 Y는 세 치 혀로 내 인생을 끝내버렸다. 나는 만 나이가 갓 적용되기 시작하던 시기라 그렇게 답한 것이었다. 그의 말에 나는 렉(?) 걸린 컴퓨터처럼 몇 초 간 작동을 멈춰버렸다. 내 머릿속 컴퓨터 바탕화면은 다운되어 검은 바탕 위에 '다 끝났는데' 다섯 글자만 먼지처럼 어지럽게 떠다녔다.
대체 뭐가 끝났다는 거지. 여자가 마흔 다 됐으면 늙었으니 예쁜 시절 다 갔다는 건가. 아니면 이혼했으니 여자로서 인생 망했다, 결혼시장에서 퇴물이라는 건가.
그와 내가 안지 고작 한 달인데 나의 인생은 물론 나의 결혼과 이혼에 단 1%의 지분도 없는 자의 입에서 나온 막말이었다. 그것도 20대 초반 여자 이야기를 하다가 30대 후반 여자 이야기를 불쑥 꺼내며 다 끝났다니. 머릿속 컴퓨터는 이제 파란 화면으로 변했다. 자리에 앉은 채로 굳어버린 내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 아아니... 우리 와이프가 엊그제 그러더라고. 자기 이제 사십 넘었다 이제 다 끝났다."
싸늘해진 사무실 공기를 눈치챈 Y가 뒤늦게 되지도 않는 수습을 시도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남직원들도 Y의 말에 당황해 '갑자기 무슨...' 하고 작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남자가 들어도 어이없는 말이었을까. 그들 중 누군가 눈짓으로 턱짓으로 내가 바로 파티션 뒤에 있다는 표시를 한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그대로 소리 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휴게실에 가서 심호흡을 하는데 눈물이 흘렀다. 괜찮은 부서장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잘못짚었다.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막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재미 삼아 내뱉을 만큼 인성도 교양도 기본적인 존중도 없는 사람이었다.
텅 빈 휴게실에서 혼자 숨죽여 40여분을 울었다. 내 인생 뭐 해준 거 있다고 왜들 이래 진짜. 하염없이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이혼 사실을 밝힌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편견을 가지거나 상처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스스로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비열한 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피해 이렇게 혼자 질질 짜고 있었다. 무력감에 더 화가 났다.
지옥 같은 생활 속에서 이를 악물고 나와 아이를 구해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끝났네 마네 하며 내 인생을 재단해 버렸다.기가 막혔다. 단지 나이가 많다는 뜻이었다고 해도 해선 안될 말이었다. 30대 후반이면 여자 인생 끝이라는 생각을 가진 남편의 40 넘은 아내는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까.
처음에는 서러움에 눈물만 났다. 하지만 진정이 되고 나니 컴퓨터가 재부팅되면서 다시 전원이 들어왔다. 인사고과를 평가할 권한이 있는 부서장이라 해도 타인의 삶을 제멋대로 평가할 권리는 없다.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을 권리는 더더욱 없다.그는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리더이며 성인지감수성을 말아먹은남자인지 전 부서원들에게 커핑아웃한 것이었다. 내 인생에 그가 보태준 것이 없으므로 내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말하든 무시하면 될 일이다.
어느 정도 감정과 생각이 정리되자 눈물이 멈추었다. 찬물을 몇 차례 끼얹어 벌게진 눈가를 진정시켰다. 몇 차례 심호흡을 더 하고 차분해진 뒤에 나갈 때와 같은 속도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무실로 들어갔다. Y는 자기 방으로 돌아간 뒤였고 테이블은 텅 비어 있었다.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 날이 되어 어제 자리를 비웠던 동료 여직원에게 한 남직원이 내가 괜찮은지 물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영문을 몰라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녀와 따로 점심시간에 나가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 직원은 나보다 더 분개했다. 언니버서리 씨가 인생 끝난 거면 50대인 나는 죽으라는 소리냐며 가슴을 쳤다. 예전부터 문제가 있는 발언을 많이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바로 용기 내지 못했다. 이혼한 싱글맘이라는 사실을 부서 외 조직 전체가 알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한 번은 참자고 생각했다. 다행히 Y도 그날 이후로 더 선을 넘지는 않았고, 몇 달 후 인사이동으로 타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다섯 글자로 내 인생을 끝내버린 막말 사건은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잊고 살던 어느 날, Y가 이동한 새 부서에서 폭언과 성희롱 등으로 내부신고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곳에서도 똑같이 안하무인으로 행동했겠지. 그리고 누군가 참다못해 용기 냈으리라. 이제 Y를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되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