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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필라테스

운동에도 기승전결이 있다

by 한줌

최근 시작한 필라테스에 나름대로 재미를 붙였다. 일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날리고 땀을 흠뻑 흘리는 그 오십 분이 참 소중하다. 동작과 호흡에 집중하며 숨어 있던 속근육들을 만나고 있다. 흘러내리는 뱃살 속에도, 흔들리는 소위 '안녕살' 위에도, 아프다고 내버려 뒀던 엉덩이 깊은 곳에도 근육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귀찮고 아프다는 핑계로 운동은커녕 스트레칭도 잘 안 했던 주인은 그저 고맙고 반갑다. '와 여기도 있네? 진짜 있었네!' 언젠가 자신을 찾아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는 유기견처럼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나 보다.


키 크고 팔다리가 긴 강사님의 지시에 따라 나는 오늘도 숨어 있던 속근육 찾기 놀이를 하고 있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던 배꼽 속과 허벅지 안쪽 내전근 깊이 힘을 전해보려 낑낑댄다. 그러다 보면 놀랍게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나의 유기 근육들이 눈을 뜬다.


'앗 드디어 오셨군요! 주인님, 저 여기 있어요. 오래전부터 쭉 여기 그대로 있었어요!'


잃어버린 애완견을 이십 년 만에 만나는 감격이다. 혀 느낌이 없던 부위에 뭔가 설명할 수 없이 뻐근한 한 줄기 힘이 전해질 때, 처음 경험해 보는 희열을 느낀다. 신대륙을 발견하고 농지 개간을 시작하는 게 이런 기분일까. 진짜 근육 없는 사람도 꾸준히 운동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이제는 믿어볼 수 있겠다.


사실 키다리 강사님의 필라테스 수업이 나와 잘 맞는다는 걸 느꼈던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 딱 한 번 다른 강사님의 수업을 듣게 된 적이 있는데, 그때 알았다. 키 큰 강사님 수업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기승전결이 완벽한지를.


우선 키 큰 강사의 수업은 가벼운 인사와 최소한의 스트레칭으로 가볍게 시작된다. 한 동작당 구령도 여섯 정도. 그렇게 서서 하는 가벼운 스트레칭 후에 오늘 어느 부위 운동을 주로 할지 알려준다. 수강생들에게 수업의 집중 포인트를 인지시키는 거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이걸 알려줌으로써 무작정 강사의 동작만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몸과 마음이 운동할 준비를 갖추게 되는 효과가 있다. 확실히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수업의 도입인 '기'라 할 수 있다.


곧이어 해당 부위를 부드럽게 이완했다 수축하는 반복 동작을 시작한다. 본격적인 운동 단계로 가기 위해 몸을 덥히는 워밍업 단계, '승'이다. 예를 들어, 복근과 내전근, 엉덩이 근육에 집중하는 수업이라고 해보자. 바렐에 승마하듯 옆으로 올라타 무릎을 굽히고 다리 전체로 바렐을 감싸고 앉는다. 들이마시는 숨에 다리를 앞으로 뻗어내며 동시에 내전근과 엉덩이를 최다한 조여 몸이 약간 위로 솟게 한다. 여섯을 센 뒤 다시 숨을 내쉬며 천천히 원래자세로 돌아간다. 어렵지 않은 동작이지만 포인트 부위에 자극이 들어가며 서서히 체온이 올라가 부상을 방지해 준다.


그렇게 두어 가지 동작을 이어하며 서서히 몸을 덥혀준다. 수강생들의 호흡 소리도 따라서 커진다. 여기저기서 후 하고 긴장했던 근육을 이완할 때 숨도 같이 내뱉는다. 키다리 강사님은 네댓 명의 수강생을 하나씩 봐주며 목표 부위에 제대로 힘을 주고 있는지 체크한다. 손가락 등으로 가볍게 터치하는 식이라 수강생들도 놀라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강사님의 손이 닿으면 아 여기에 힘을 줘야 되는구나 다시 인식하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충분한 준비동작을 거치며 수강생들은 벌써 땀이 맺히고 얼굴이 상기된다. 잠시 아기 자세로 쉬세요 하는 반가운 말에 여기저기서 털썩 머리를 떨구고 숨을 정돈한다. 그런데 쉬며 들으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숨 세 번밖에 안 쉰 것 같은데 헉헉... "이제 본격적인 운동으로 들어갈게요."


키다리 강사님은 해맑은 얼굴로 여기까지가 워밍업 단계였음을 알린다. 속으로 벌써 힘든데 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하는 약해진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꼴까닥 삼킨다. 강사님은 쉬는 시간도 숨 고르게 몇 번하면 벌써 끝난다.


이미 땀이 촉촉하게 난 상태로 그날의 진짜 운동을 들어간다. '전'이다. 바렐 위에 걸터앉아 양발을 앞 래더에 걸고 손은 머리 뒤로 깍지를 낀다. 배꼽 쏙 엉덩이 힘! 내전근 조이고! 서서히 몸을 말아 뒤로 사선으로 내려간다. 앞 단계에서 자극을 넣어둔 복근과 엉덩이근육, 내전근이 다시 강하게 자극된다. 승에서 어디가 포인트인지 학습이 되어 있어 자연히 그곳에 집중하게 된다. 다만 더 강한 힘으로 버티기를 반복하며 강화하는 것이 이 단계의 특징이다.


구령도 여기서는 여덟까지 가고 한 자세를 잘 소화하면 추가로 업그레이드가 된다. 에이, 비, 씨 단계. 가끔 디 단계까지도 간다. 처음에 양팔을 가슴 앞에 크로스하고 복근 운동을 했으면, 그다음은 팔을 뻗어 앞으로 나란히를 한 상태에서 몸이 올라올 때 팔도 하늘로 뻗는 식이다. 그것도 잘 따라오면 이제 한 발씩 떼어서 동시에 무릎을 접는 형태로 더 깊은 곳 복근까지 괴롭힌다.


이렇게 글로 쓰니 세상에 다시없을 악마 교관의 고문 기술 같다. 그런데 우리 강사님은 키만 컸지 얼굴은 순두부상이다. 순두부의 해맑은 미소를 보면 '저는 여러분을 괴롭힐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런 아기 같은 얼굴로 악마의 기술을 구사하는 우리 필테쌤이 나는 좋다. 매력 있다.


그렇게 악 소리 나는 마지막 씨, 디 단계를 마치고 나면 수강생들은 떨리는 몸에 힘을 풀고 바렐 위에 철퍼덕 엎어진다. 바렐의 우아한 곡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우리의 모습은 흡사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시계와도 같다. 그림 제목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서 검색창에 '흘러내리는 시계'라고 적었다. 원제는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라고 한다.


에이아이(AI)의 답변으로 그림 속 녹는 시계는 시간의 고정된 개념을 부정하며 기억 속에서 시간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한다.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필라테스 교실 바렐 위에서 녹아내리던 그 시간의 나는 얼마간 지금이 몇 시인지, 끝나고 무얼 해야 할지와 같은 일체의 의식과 생각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기억 속에서 그날의 시간이 재구성되고 있다.


그렇게 가장 강도 높은 운동의 마지막 버티기를 마치는 순간이 한 시간의 절정, 클라이맥스다. 절정 후에 찾아오는 녹아내리는 시계 타임을 지나 처음 수업을 시작했던 매트로 내려와 선다. 오늘 집중적으로 자극된 부위를 이완시켜 주는 스트레칭을 통해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해 준다. 호흡이 안정되며 그에 따라 나의 몸과 마음이 현실로 돌아온다. '결'의 순간이다.


여기까지 무사히 마치면 오. 운. 완. 오늘도 귀찮다고 빠지지 않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운동을 완료했다. 하루 중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다. 계획한 것을 실천했다는 뿌듯함이 먼저 오고,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탓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운동기구를 정돈하고 교실을 나올 때 내 얼굴에는 오늘도 멋쩍은 미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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