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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줌 May 21. 2024

<평평한 네덜란드에는 네모가 굴러간다> 바로 쓰는 서평

연하어 작가님께 보내는 노을빛 러브레터






이 책을 구매한 건 순전히 호기심에서였다.


'무연고' 작가가 반가운 책 출간 소식을 전하며 본인의 원래(?) 필명을 공개했다. '연하어(煙霞語)'. 딱 세 글자 말고는 아무 설명이 없었다. 연기 연에... 무슨 하에.. 말씀 어 자라. 무슨 뜻이지? 또렷이 그려지지가 않았다. '무연고'는 오래 해외생활을 했다는 작가소개만 보아도 의미가 전해졌는데, 연하어는 도통 손에 잡히지 않는 이름 같았다. 네덜란드를 '화란'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현지 이름을 음차한 건가 싶기도 했다.


나는 무연고 작가의 <완. 초. 작. 브런치로 작가 되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는 독자이자 브런치 마을 이웃으로서 축하를 전하고 싶어 대뜸 책부터 주문을 했다. 네덜란드에 대한 호기심 반, 연하어라는 수수께끼 같은 필명을 알고 싶은 탐구심(?) 반이었다.


며칠 뒤 책이 배송되었는데 하필 직장에 일이 터져 너무 바빴다. 유철현 작가님의 <어쩌다 편의점>도 함께 받았다. 산뜻한 주황색과 쨍한 노란색 치마를 두른 두 미인이 얼른 나부터 읽어달라고 치맛단을 나부끼며 나를 유혹했다. 아흑. 당장 읽고는 싶은데, 지금 시작하면 제대로 읽지 못할 것 같아 망설였다. 결국 바쁜 업무를 다 끝내고 마음 편하게 읽기로 하고 그녀들(?)을 애써 외면한 채 현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책을 받아놓고는 20일 만에야 첫 번째 오렌지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며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긴다. 땅도 평평한데 네모가 굴러가진다고? 어떻게? 그 물음은 자연히 이 책을 펼치게 만드는 힘이 된다. 게다가 네덜란드라니. 풍차와 튜울-립과 거스 히딩크의 나라! 잘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되는 순간이다. 더 알고 싶다.



'평평한 지형을 가진 네덜란드는 동그란 바퀴를 가진 자전거를 타기에 최적의 환경이면서도, 그 바퀴가 설령 네모난 모양이어도 어디든 굴러갈 수 있을 듯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곳이다.' (p.6)


'누가 동그라미를 굴리든 별을 굴리든, 아니면 네모를 굴리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그들의 생활 모습에서 틀에 박히지 않은 채 본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도 있는 자유로움을 읽었고,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그로 인해 개인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질 수 있음을 배웠다.'(p.7)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이미 제목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네덜란드에서 네모가 굴러간다는 건 같은 '네'자로 시작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타인이 무엇을 굴리든 별로 상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네덜란드 특유의 분위기를 담은 제목이었다.


공원에서 찌그러진 굴렁쇠를 굴려 보려고 애쓰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열에 아홉은 '바보 아냐? 바퀴는 동그래야 굴러가지. 찌그러지고 모가 난 걸 어떻게 굴려?' 할 것이다. 그런데 연하어 작가가 살고 있는 네덜란드에서는 좀 다른가 보다. 네모여도 평평한 땅을 어디든 굴러갈 수 있을 것만 같고, 누가 그런 시도를 한데도 함부로 비웃지 않을 듯하다. 누가 무엇을 가지고 어떤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철저한 무관심처럼 보일 수도 있다. 동시에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참견하지 않는 적당한 무신경함으로도 읽힌다. 자신의 삶도 그와 같은 존중을 받기를 원하기에 타인의 생활에도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제1부 나의 요스튼에게'에는 <아이 친구의 엄마가 연애 프로그램에 나온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 담겨 있다. 네덜란드의 학교 이야기인데, 새 학년이 시작될 때 학생들은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발표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발표를 하기로 정한 아이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얘기를 모두 거리낌 없이 친구들에게 말하고는 한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 심해져서 노숙자로 지내거나 알코올 중독 치료 시설에서 지내서 어머니와 형과 살고 있다고 말하는 아이, 부모님이 이혼해서 2주에 한 번씩 부모님 집을 옮겨 다니며 지낸다는 아이, 할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살해될 수밖에 없었던 아픈 가정사를 얘기하는 아이, 척추가 점점 휘어지는 병을 갖게 된 걸 고백하는 아이, 아버지를 잃은 후 정신과 상담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고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아이까지, 그동안 내 아이들이 반 친구들의 발표 주제로 들었던 이야기는 그렇게 매우 다양했고, 또 진실되었다. (중략) 이런 이유 때문인지, 행동이나 외모가 지저분한 걸로 다른 친구를 놀리는 경우는 있어도, 개인적인 가정사를 갖고 다른 친구를 놀리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p.21~22)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 그게 상처가 아님을, 나만 겪는 아픔이 아님을, 다른 친구들도 겪을 수 있는 일임을 나누는 용기를 아이들은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치유하고 자신감을 얻으며 교류하는 법을 배워가고 성장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p.25)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 우리 아이를 떠올렸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는 어떤 신학기를 맞이하게 될까. 한국의 초등학교에서는 어떤 주제로 처음 친구들과 관계 맺기를 시작할까 궁금해졌다. 네덜란드와 문화도 언어도 다른 우리나라는 또 한국 교육만의 장점이 있겠지 하면서도 부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이혼 가정이라는 '남들과 다른 특징'을 갖고 시작하는 학교생활에서 그 첫 만남이 얼마나 중요할지 알고 있기에. 그리고 어쩌면 쉽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기에 내게 이 글이 더 다가왔던 것 같다. 아픈 가정사를 '숨겨야 하는 비밀이나 치부, 약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이야기'로 어릴 때부터 받아들이고 나누고 공론화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그런 분위기의 사회를 경험하는 아이들은 얼마나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제3부 저녁 냄새, 겨울 냄새, 쿠키 냄새'에 <아이를 독립시킬 최적의 시기>라는 글이 있다. 네덜란드 부모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교육관이 담겨 있다. 아이들은 13세 무렵부터 간단한 파트타임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대학 학비를 마련하고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는 특별히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의 이야기 아니라, 부모가 모두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좋은 집에 사는 평범한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적혀 있다. 파트타임 일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독립 연습'인 것이다.



'그 근본에 깔려 있는 분위기는 '너는 너고, 나는 나다'이다. 부모의 삶과 아이의 삶을 개별적으로 나눠서 생각하고, 부모의 돈과 아이의 돈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중략) 파트타임 일을 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버는 목적 외에, 독립해 갈 연습을 하며 독립 자금을 마련하고 삶을 배울 기회로 생각한다. (중략) 그렇게 아이들이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나가는 대신, 아이들은 삶의 결정권과 주도권을 갖게 되는 식이다. 반드시 대학에 갈 것을 강압하지도 않고, 아이가 선택할 직업을 가지고 부모가 간섭하는 일도 흔하지 않다. 아이가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면, 부모와 자녀는 자신들의 인생을 각자 개별적으로 돌봐가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한다.'(p.134)



나는 부모로서 아이 양육의 목표를 '자립'에 두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 대목을 읽을 때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삶의 결정권'이다. 내 힘으로 번 돈을 어디에 사용할지 온전히 스스로 결정하며 삶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자립을 경험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부모들도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한정된 자원으로 무엇을 구매하고 무엇을 구매하지 않을지 고민하고 선택하며 배우는 시간을 사는 것 아닐까. 그 경험이 결국 아이들이 인생에서 무슨 일을 선택하고 어떤 친구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할지 같은 더 넓고 중요한 인생의 선택으로 확장될 테니까.


글을 읽으면서  '실리적이지만 매정하지는 않고, 독립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독히도 가족 중심적인'(p.135) 네덜란드인들의 삶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챕터까지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며 어딘가 허전했다. '연하어'라는 필명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서였다. 나는 그래서 한자사전을 검색해 한 자 한 자 찾아보았다.


연기 연은 맞았고, 두 번째 글자는 노을 하 자였다. 연기와 노을. 잠깐 동안만 존재하며 잡을 수 없고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져 버리는 것들이었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미스터선샤인> 김희성(변요한)의 대사가 떠올랐다.


"나는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연하어 작가가 필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연기와 노을처럼 아름답지만 이내 사라지는 그 찰나의 순간들을 언어라는 틀에 담아내겠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부는 바람에 흘러가며 서서히 흩어지는 연기와 노을처럼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삶 살고 싶다는 소망도 담겨 있는 듯하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내가 책을 통해 만난 연하어 작가는 필명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흘러가는 대로 살다 네덜란드라는 먼 나라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며 그것을 글로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불처럼 화끈하지는 않아도 연기처럼 아련하고 은은한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봄밤의 저녁노을처럼 사람 마음을 좀 울렁이게 하는 면이 있다.


그 매력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서점으로 달려가 오렌지 색 치마를 곱게 입은 그녀의 책을 집어 들고 첫 장을 펼쳐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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