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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면진 Apr 24. 2024

Prologue : 굳이 이야기를 시작하며

사적인 글쓰기의 이유

희한하게도 이사 횟수가 가난을 증명한다.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왜 가난한 이들은 이사를 그렇게 자주 다니게 되나. 나의 어렴풋한 기억 속 첫 이사는 돌아가신 이모의 남편 즉 이모부의 회색 엑셀 자동차 안이다. 다소 긴 시트 목받침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신기했던 차. 그 차를 타고 우리는 어느 동네 구석 빌라로 향했다. 나름 방 세 개쯤 있던 곳이었다. 옥색 상하부장이 있던 부엌을 쳐다보며 인생이 뭐길래 이렇게 힘든가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고작 7살에. 남들이 들으면 웃을 얘기지만 그만큼 너무 척박했달까. 나는 거기서 초등학교 1학년까지를 보냈다.


초등학교 입학식이 기억난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와 함께였으나 나는 혼자였다. 그래서 도저히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서 그 추운 날 코 흘리며 멀뚱거리고 서 있다가 누군가(아마도 다른 반 선생님)의 안내로 교실에 겨우 들어갔었다. 그 학교에는 내가 꽤 따랐던 형, 교회 목사님의 아들이 다니고 있었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형이 나의 인사를 받지 않아 매우 당황스러웠다. 당시 엄마는 그 교회를 나오기로 결정했고, 그에 대한 서운함을 그 형의 부모 즉 목사님 부부가 자식들이 듣게 얘기했으니 그러지 않았을까. 당시 사모님(그 형의 어머니)은 내가 체할 때마다 바늘로 손을 따 주시고 아플 때마다 만져주셨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까지 지극정성으로 성도를 돌봤는데 다른 교회로 옮겨간다니 당연히 서운할 법도. 그러나 이런 걸 이해하기엔 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그 형의 외면이 꽤나 아픈 이별로 남아있다.


가세가 기울다 못해 주저 앉아 원래도 가난한 우리 집은 단칸방에 엉덩이를 붙이게 됐다. 말 그대로 단칸방이라 (다른 칸이 될 수도 있는) 화장실도 제대로 없었다. 방에 들어가기 전 달랑 붙어 있는 부엌의 바닥에 겨우 있는 수도로 씻었고, ‘볼일’을 보려면 마치 해리 포터가 얹혀 살던 집에서 처량하게 살았던 공간과 비슷한, 계단 밑에 화변기 하나 달랑 있던 곳에서 해결해야 했다. 쿰쿰한 냄새가 나던 그곳에 여름이 되면 가끔 애벌레들이 기어와 꿈틀댔더랬다. 추운 날에는 화장실 가기가 얼마나 싫었던지. 당시 옆집은 그래도 사람 사는 곳 같았다. 방도 한 두 개 있었던가. 옆집이 이사를 나가고 난 후 문을 제대로 잠그고 가지 않아 화장실을 몰래 썼던 기억이 있다. 화장실을 갈 때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어 꽤나 좋았지만 뭔가 도둑놈이 된 것 같아 엄마에게 물으니 그 정도는 괜찮다고 했다.


그 동네에서의 기억을 한 단어로 말해보라면 ‘야만’ 정도 된다. 가난한 동네는 으레 아이들이 거칠기 마련. 그에 비해 나는 계집아이 같이 빌빌대는 ‘어린 양’이었다. 마치 이리떼로 보내는 것 같다는 예수의 말처럼 나는 거친 아이들의 틈에서 살아남기에 바빴다. (사실 이런 생존 생활은 초등학교 시절 내내였다.) 이렇게 바깥 사회도 골치 아팠지만 집도 시끄러웠다. 부모의 갈등이 점점 심해져 내 손으로 119에 전화해 엄마를 실어 보냈던 적도 있다.


그 지긋지긋한 단칸방에서 탈출해 근처 반지하로 이사를 갔다. 방이 두 개였다. 컴퓨터도 생겼고 인터넷도 달았다. 유달리 그 집에 있을 당시 알레르기가 심했다. 눈은 항상 간지러웠고 코는 훌쩍 댔다. 아마도 곰팡이 때문 아니었을까. 방학 때마다 혼자 있을 때 엄마는 <탈무드> 같은 책을 읽으라 했지만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봤던 애니메이션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비밀일기)>, <세일러문>, <낚시왕 강바다> 등이 기억에 있다. 특히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에서 뿜어내던 ‘주황빛’의 정서는 아직도 나에게 생생하다. 특히 음악이 너무 훌륭했다. 지금 봐도 여러모로 명작이다. 다만 초등학교 저학년이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달까.


엄마는 그 어려운 와중에 수영 강습을 보냈다. 태권도는 이미 일찌감치 실패했는데 아이가 너무 허약하니 운동이라도 하나 시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보냈던 것 같다. 수영장은 백화점(보다는 쇼핑센터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한 수준의 곳) 높은 층에 있었다. 수영장 입구에 들어서니 강사들의 사진과 이력이 쭉 있었다. 보자마자 이 사람은 아니었음 좋겠다 싶었던 인상이 무서웠던 강사가 결국 나의 수영 선생님이 됐다. 마초의 냄새가 물씬 나는 분이었달까. 물론 좀 무서웠지만 좋은 분이셨다. 수업의 한 텀이 끝나갈 쯤이어서 그랬는지 하루는 강습 받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과자파티를 해 줬다. 그때 먹은 마시멜로가 내 인생 첫 마시멜로였다.


기억나는 당시의 친구 하나는 우리 반 반장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빨간 빛이 도는 갈색이었던 그 친구는 얼굴에 조금의 주근깨가 있었다. 마치 빨간머리 앤처럼. 그 친구는 착했고 잘 생기기도 했고 심지어 공부까지 잘 했던 걸로 기억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을 때 연락해 만났던 기억이 있다. 비가 왔던 날이었는데 우산을 들고 오지 못해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우산을 쓱 씌워줬더랬다. 그 친구였다. 친절한 우산으로의 엄호(?)를 받으며 그 친구가 다녔던 컴퓨터 학원에 잠깐 들렀다가 친구의 집에 갔다. 그때 디지털 카메라를 처음 봤던 것이 기억난다. 이것이 그 친구와의 마지막 기억이다. 야생과 같은 정글에서 너무 따뜻한 친절이었다. 그 친구는 왜 나에게 잘 해줬을까. 나는 소위 '쭈구리'였음에도 말이다. 그 친구의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아 가끔 슬프다.


세번째 학교를 다닐 당시는 처음 아파트에 살게 돼 뭔가 설렜던 기억이 있다. 매일 엘레베이터를 탄다는 기대감이 있었달까. 주공아파트였고 12층이었다. 층수가 예수 제자의 수여서 뭔가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남다르긴 했다. 제일 끔찍했던 시절이기때문. 학교에서 괴롭힘은 꽤 심했고, 선생은 나 같은 찌질한 학생을 보호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싸움을 붙였다. 뭔가 잘못된 교육이었다. 너무 학교가 끔찍해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제일 먼저 교실에서 나와 빠른 걸음으로 집에 갔다. 물론 나보다 더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있었지만 그 친구를 도와줄 겨를 없었다. 나는 나 살기 바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에서 컴퓨터로 음악을 듣거나 당시 유행하던 게임을 했다. 애석하게도 이때는 빨간머리 친구처럼 나에게 친절한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같은 반의 어떤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어 감동받았지만, ‘친구’라는 관계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리고 엄마의 재혼으로 나는 또 학교를 옮기게 됐다. 내가 기억하는 세번째 이사, 네번째 학교였다. 이 학교에서는 3개월 정도밖에 머물지 않았다. 재혼 당시부터 이사를 갈 계획이라 3개월 정도 기다려도 됐었지만 못 기다리겠다며 빨리 집에 들어오라는 누군가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 그 학교에서는 꽤 평화롭게 지냈다. 같이 다니던 친구가 어려웠던 과학 시험 문제를 몰래 나에게 커닝할 수 있게 도와줬던 것, 떠나기 전 마지막 날 같은 반이었던 쌍둥이 형제가 축구에 치읓(ㅊ)도 모르는 나를 두고 축구공으로 너무 친절히 놀아줬던 기억이 있다. 마치 빨간머리 친구처럼. 이후 또 학교를 옮겼고 마지막으로 옮긴 그 학교도 나름 정글이었다만, 어쨌든 나는 다섯번째 학교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희한하게도 중학교 당시 특별하다고 느낄 학교에서의 기억이 별 없다. 물론 남학교라 워낙에 선생들의 체벌이 심했던 것은 있지만 괴롭힘도 별 없었고, 그렇다하여 특출나게 친했던 친구도 없었다. 중학교때부터는 옮긴 지 얼마 안 된 큰 교회 사람들과 정을 붙이고 살았기 때문이리라. 고등학교때까지 그러했다. 학교에 친한 친구가 없었고 모두 교회 사람들이 주변이었다. 중학교 졸업식에도 학교 친구와 찍은 사진이 없고 고등학교 졸업식때는 아예 찍은 사진조차 없다. 그만큼 학교라는 곳에 정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리고 희한하게도 지금까지 연락을 하며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는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인데,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다. 2학년때 반장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친구였다. 정작 나와 그를 주선한 친구는 멀어져 연락도 하지 않는다. 여하튼 이 친구(‘안경친구’라 부른다. 안경사로 일하기 때문)와는 거의 매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세월이 꽤나 흘러 안경친구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됐고 나는 음악을 전공했으나 디자이너로 일하더니 지금은 남들이 쉬이 정체를 알기 힘든 곳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칼럼도 쓰면서.


속해 있는 곳에서 격월로 발간되는 기관지에 내 업무랄 것은 마지막 교정, 디자인 정도인데 이번에는 유독 다른 이들이 바빠 내가 거의 대부분의 글을 쓰게 됐다. (글을 쓴다 하여 나의 글을 쓰는 것은 아니고 소위 강의나 녹취를 정리하여 기사화하는 것.)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보니 글이 주업이 된 느낌이랄까. 물론 이번만 그런 것이겠지만. 그렇지않아도 나는 달에 한 번 문화 평론을 담은 칼럼을 모 매거진에 기고하며 꽤 치열하게 쓴다. SNS도 대부분 공적인 주제를 다루지, 사적인 얘기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공적인 글쓰기에 집중하던 내가, 물론 지금도 공적인 글쓰기를 치열하게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게 된 것은 반 년 전 추석에 읽은 박완서 작가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은 후의 결심이었다.


고 김윤식 서울대 교수가 책 말미의 작품 해설에서 집요하게 묻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그분의 해설이 완전히 지성적 패배감에 절어 있게 만들기도 했으나, 서사시와는 달리 ‘창조적 기억’이 개입된 것으로 남이 써 줄 수 없는 것이 소설이라며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이 순전히 기억에 의존하는 글쓰기로서 ‘순수 혈통’의 훌륭한 소설이라는 평은 나에게도 이러한 글쓰기가 가능하겠구나 ‘착각’이 들게 했다. 어떠한 의미로 점철된 오브제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나의 게으른 읽기는 먹물 깨나 가득한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것일 수 있지만 굳이 찾지 않아도 마음에 남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메타포라는 무식한 고집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고, 나는 그 고집대로의 글을 남기려는 것이다.


왜 굳이 남에게 퍽 관심 받지 못할 '나의 기억'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가. 적극적으로 했던 공적인 글쓰기로 어떤 큰 행사의 장소를 일주일 전에 옮기기도, 어떤 물건을 팔지 못하게 하기도, 어떤 곳의 간판도 바꾸게 하기도, 어떤 누군가를 교단에서 물러나게 하기도 할 정도로 어느 정도 공적인 목표를 이룬 지금의 피폐해진 일상에 연한 색 하나 칠해 보는 것이다. (피폐해졌다는 말은 그만큼 던졌던 담론 혹은 내용이랄 게 누군가에게는 심각했다는 뜻이다.) 비록 결심한 지 6개월이 지나서야 펜을 잡았지만 말이다. 사적인 글쓰기보다 공적인 글쓰기 좀 하라며 가르치고 주장하고 채근하는 내가 굳이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마 그만큼 뭔가 상황이 ‘크리티컬’하기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안의 상황이든, 바깥의 상황이든 간에 말이다.


유튜브에 나의 피아노 연주 영상을 이따금씩 올려둔다. 전공까지 한 피아노 실력을 유지하는 것과 함께 내가 들으려는 것이다. 남들이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내가 원하는 곡을 쳐주지 않으니. 이 글도 마찬가지다. 누가 보는 것이 중하지 않다. 내가 쓰는 것 자체가 중하다. 너무 자기 밖에 모르는 세상이 돼 ‘나를 돌아본다’는 말을 매우 안 좋아하지만 돌아볼 예정이다. 징했던 어린 시절을 지금처럼 낯부끄럽게 하나씩 꺼내보며.


그리 긴 여정은 아니었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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