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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 문지기 Jan 20. 2023

3월 17일 (악마를 보았다)

내 안의 악마까지

3.17일 비

우리 가족은 상처가 많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아니라, 숨길 수 없는 육체의 결함이다. 말하자면 장애인 가족이다.

아빠는 왼쪽 다리를 절뚝 거린다. 내 나이즈음에 기차에서 달걀, 맥주 등이 담겨있는 음식카트를 운반하다 선로에 떨어졌다고 한다. 다친 다리는 내 팔뚝보다 얇아서 마치 황새 다리 같다. 옷에 가려져 티나진 않지만, 걷기 시작하면 몸은 위아래로 흔들리고, 술 취한 날은 항상 왼쪽으로 쓰러진다. 그러면 아빠는 "어후우.."라는 한숨을 내쉰 뒤,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오른 다리부터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엄마도 다리에 문제가 있다. 화상이다. 청파동에 있는 작은 봉제공장에서 불이나, 뜨거운 섬유원료가 다리 위로 떨어져 그대로 굳어버렸다. 발목부터 무릎까지, 지렁이 여러 마리가 꿈틀대는 것 같은 상처가 있다. 나는 자주 봐서 아무렇지 않지만, 가끔 오는 친척들은 얼굴을 찌푸리곤 한다. 그러면 엄마는 소리 없이 장롱을 뒤져, 두꺼운 검정스타킹과 양말을 꺼내 다리를 감춘다.

그래도 우리 가족이 소외감을 느낀 적은 별로 없다. 동네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아서, 서로의 상처를 모른 척해주기 때문이다. 누구도 아빠를 절뚝이라 부르지 않고, 나도 말 못 하는 연탄집 아들을 벙어리라고 놀리지 않는다. 외모는 추해도 따듯한 마음을 가진 공동체, 그게 우리 마을이다. 하지만 마을을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데, 오늘 난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다 악마를 마주했다.

약한 봄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농구공이 들어있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문방구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웅성웅성', 교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남자 애들이 뛰노는 거겠지' 하며 무시했는데, 소리는 갈수록 요란해지고 함성까지 터져 나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한 여자아이가 서너 명 즈음되는 남자 애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었다. 남자애들은 우산 끝으로 여자아이 팔에 난 붉은 반점을 찌르며, "파충류, 도마뱀 같은 년"이라 돌아가며 욕했다. 여자애가 도망가면 빠르게 달려와, 그녈 원처럼 둘러싼 후 악마의 놀이를 반복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모욕당하는 소녀는 누나였다.

나는 고민했다. '누날 도와야 할까?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저렇게 놀리다 금방 그만두지 않을까?' 하며 바라봤다. 하지만 기대는 보기 좋게 깨졌다. 누나가 지쳐 도망가는 걸 포기하자, 주변에 있던 초등학생까지 괴롭힘에 가세했다. 누날 둘러싼 원은 점점 커지고, 흥겨운 함성소리가 거리를 뒤덮었다.

 

'아.. 인간은 역시 악마인가?'.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원을 헤집고 들어가 초등학생의 대가리에 농구공을 던졌다. 꼬마는 한방에 나가떨어지고 웅성거림은 정적으로 바뀌었다. 괴롭히던 애들 눈엔 두려움이 보였다. '이런 일이 없으려면 주도했던 놈을 손 봐줘야 해', 나는 주모자인 3학년 멸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녀석의 우산을 거꾸로 들어, 손잡이 부분으로 주둥아리를 치기 시작했다. 평생의 상처를 몸에 새겨주고 싶었다. 뱀처럼 더러운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계속 내리치자, 하얗고 딱딱한 것도 튀어나왔다. 나는 멸치의 앞이빨을 모두 깨버린 후 심판을 멈췄다. 그리고 누나를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누나는 계속해서 울먹였다. 짜증이 났다. 누나의 징그러운 붉은 반점도, 놀리는 애들도, 그리고 사람을 때린 나 자신도 모두 역겨웠다. 또 다른 괴롭힘을 막으려 했다지만, 실은 내 안의 악마를 주체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 악마가 커질까 두려웠다. 아빠처럼 "어후우.."라는 한숨을 내쉰 뒤, 누날 바라봤다.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만 울어. 엄마가 걱정하니까. 그리고 울어봤자 아무것도 해결 안돼. 누가 또 괴롭히면, 차라리 이 칼로 그어버려 알겠지?", 가방에서 커터 칼을 건네며 답을 강요했다.


"응..."

"이제 집에 가자."


우린 마을 향했다. 3월의 짧은 해가 지고 있었고, 나는 내 안의 악마에게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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