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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오 May 08. 2024

풍요의 단상

우리가 풍요로워질 방법은 오로지 경제적 자유뿐일까



  지난 토요일 나는 동생과 무척 풍요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 날은 하늘의 풍경, 공원의 자연과 동네 주민들의 여유로움이 어우러져서 분위기가 무척 평화로웠고 우리는 중학생 당시 즐겨듣던 밴드 노래들을 추억하며 그 때로 돌아간 것처럼 천진난만한 마음으로 웃었다. “당장 100억이 생겨도 이런 감정적 충족감은 단번에 생길 수 없을거야.” 내가 그랬다. 자연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는 감각, 음악과 예술을 즐기고 좋아하는 마음, 그것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어울려주는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분명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까.


  언젠가 월 700만원의 수익을 얻기 시작하면 행복 지수가 돈으로 제한받지 않는다는 이야길 들었다. 아니, 10억의 자산이 있으면 돈 때문에 불행할 일이 없다고 했던가?

  어느샌가 경제적 자유라는 말은 유행처럼 번져 모든 사람들의 꿈이 되었고 풍요라는 말은 언제나 물질이라는 말과 함께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토록 부동산과 재테크에 열을 올리는 것도 주식 스터디를 하고 임장을 다니는 것도 내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삶의 평안과 행복도 따라올 것이라는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구독하는 유튜버로부터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진정한 경제적 풍요라 함은 돈이 넘칠 정도로 많은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경제적 상태에 있어도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까 한다고. 그 이후 나는 풍요라는 의미를 다시금 고찰해보게 되었다. 모두가 돈 때문에 삶의 기회가 제한되어 불행해질까봐 두려워한다. 돈이 많으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겠지 싶어서 일단 돈이 아주 많아지길 소망한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참아가며 오늘을 견딘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남들 보기에, 내가 보기에 부끄러운 모습의 나‘ 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얻고 싶은 건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매일매일이 새롭고 만족스러운 행복’은 아니었을까? 그건 정녕 돈이 충분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일까? 풍요의 사전적 정의로 ‘흠뻑 많아서 넉넉하다.’는 게 꼭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나의 결핍을 채워주는 게 풍요라면, 풍요는 경험적으로도 가능하고 감정적으로도 가능하다. 일 년에 한 번 뉴스 지면에서 다루어지는 국가별 행복지수 결과를 보면 대한민국은 늘 지낮다. 한국보다 치안이 나쁘고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안정적이지 못한 남미권 국가는 늘 상위권을 차지한다. 한국 사람들은 왜 행복하지 못할까? 행복을 느끼는 유전자가 따로 있고 한국인에겐 그것이 부족하다는 말도 있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저 아주 작은 것에도 천진난만하게 즐기고 감사해하는 일이 조금 낯선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혹은 그래야만 한다고 강요받는) 한국인에게 멕시코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무척 낯설다. 때때로 이렇게 쉬어도 되나 하는 죄책감으로 연결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쉬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맞아버리는 건 아닐까.. 마치 권선징악 같은 신화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차라리 결과적인 성과나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주는 뿌듯함만이 행복을 소환하는 유일한 차선책처럼 보인다. 나부터도 그랬다. 무언가에 실패해도, 남들과 비교해서 못날 때에도 분명 삶에는 찾아보면 즐길 거리가 가득하지만 마치 그것이 패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내가 남들보다 못하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기 위한 정신승리의 일환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를 고군분투 살아가는 나를 제 3자의 시선으로 한 번 바라보자. 백수라서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나, 회사에서 밥 먹듯 야근하는 나, 강도 높은 대면 업무에 지친 나 모두 동일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타자화된 나의 삶을 보면 안쓰럽다. 하루에 잠깐잠깐 행복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행복은 사치라고 느끼는 마음가짐을 조금은 내려놓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든다. 산책을 하고, 마음이 노곤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근처에 걸을만한 공원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기분을 허락했으면 좋겠다. 내가 가진 돈으로 커피 한잔을 사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즐거운 일이라는 걸, 사랑하는 친구에게 소액의 선물을 건넬 때, 서로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말을 주고받을 때의 충족감을 좀 더 음미해보는 걸 허용해주었으면 좋겠다.


  사회는 모두 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돈이라는 게 무조건 축적되어야 한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타인을 향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으로, 나를 챙기고 보살피는 표현 중의 하나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게 진짜 풍요라면 어떨까? 그 돈으로 내가 배우고 싶었던 운동을 배우고, 악기를 배우고, 여행을 다니고 있다면 당신은 충분한 경험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하다못해 사람들로부터 어떤 제안을 받아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면? 그렇게 그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내가 또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장해나가고 있다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고 만들어낼 수 없었던 이벤트들이 삶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당신은 경험적 풍요를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


  풍요는 감각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주입식 교육처럼 전국민이 로또 1등을 소원으로 적지만 모두가 막대한 부와 명예로부터 극강의 행복을 느끼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백화점도 영화관도 몇 시간은 차를 타고 나가야하는 곳에서 식물들과 함께 할 때 편안함을 느낀다. 중위소득에 한참 못 미쳐서 그 날 벌어 그 날 살아도 그게 마음이 편한 사람들도 있다. 너무 많은 돈과 너무 많은 책임을 제공하는 명예를 가지면 불행한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나는 언제 행복을 느낄까? 궁극이라는 건 없기에 빵부스러기처럼 내 생활반경에 존재하는 감정적 풍요를 따라가보자. 그렇게 작은 풍요를 야금야금 줍다보면 또 다른 새롭고 커다란 풍요로 나는 향하게 될지 모른다. 순간순간 내가 그렇게 살아가는 걸 좋아하는 구나 알아차리고 허락해주기만 한다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내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알아차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풍요로운 사람이다. 자산이 10억도 7억도 모두 다 내면의 풍요로움이라는 도착지로 가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었다.


  “그래도 누가 100억 준다고 하면 받아.”

  지극히 현실적인 동생이 내 얘기를 듣고 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웃었다. 누가 안 받는대? 받겠지. 받을건데. 근데 그거 받으면 제일 먼저 어디에다 쓸까. 집 사고 차 사고 은행에 맡겨두고..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의 피는 뻔한 단골 레파토리로 흘러간다.


  나는 멕시코에 가본 적도 없고 멕시코에서 살아본 적도 없어서 그들이 삶을 얼마나 따스하고 평화롭게 바라보는지 알지 못 한다. 어쩌면 그들은 일찍이 모든 이들의 삶에는 풍요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지도 모르겠다. 물리학에선 시간 조차 착각일 뿐 우리에게 존재하는 건 오로지 지금 이 순간 뿐이라고 한다. 미래에 대한 수많은 걱정과 두려움도 결국 허상일 뿐이다. 아마겟돈 같은 예언 조차 허상이 되는 시대이지 않나. 한국은 그동안 신화에 가까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진보와 발전을 이루었다. 많은 것을 이루어낸 한국사회는 이제 정신적 풍요로움을 찾아갈 시기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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