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안에 살고 있는 라디오 키즈를 만날
나에게 이 물건이 지닌 의미를 정의하는
<사물 사전> #1.
애착관계 현재 진행형
꿈이었고,
꿈의 도구였던,
지금도 꿈꾸는 기계
어린 시절 집에 있는 시간은 늘 라디오와 함께 였습니다. 학원 공부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별다른 놀 거리도 없던 국민학생 시설 자유 시간이 갑작스레 쏟아지는 겨울 방학엔, 지글지글 장판이 타는 온돌 바닥에 배를 대고 업드러 지글지글 주파수를 공들여 맞추고 라디오를 들으며 방바닥과 물아일체가 되곤 했지요. 정오 가요 프로그램이 발표하는 TOP10 순위를 연필로 꾹꾹 눌러 적기도 하고 김기덕 DJ가 소개하는 팝송 제목을 한글로 소리나는 대로 적기도 했던, 그 시절 라디오는 저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 때 지글지글하던 온도와 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중학생 때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제가 가장 애청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었던 것 같아요. 시험 시간에는 나름 공부한답시고 카세프 공테이프에 일일히 녹음하느라 시간도 많이 썼는데, 녹음할 시간에 그냥 듣는 게 공부할 시간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녹음한 테이프가 여러 개 쌓이면 부자가 된 것 마냥 신나고, 시험 끝나고 몰아 듣는 그 기쁨은 요즘의 OTT 드라마 밤샘 정주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희열이었어요.
‘별밤’이 AM에서 표준 FM으로 바꿨을 때 느꼈던 환희, 이문세 아저씨가 사연 읽듯 자신의 결혼 발표를 담담하게 이야기했을 때의 충격, 그리고 가수 유재하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 별밤지기의 슬픈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별밤’ 엽서전 갔을 때 대상 탄 엽서가 의외로 소박해서 놀랐던 기억도 있는데, 한 때 저도 라디오 사연 꽤나 보내서 소개도 많이 되고 선물도 곧잘 받는 라디오 성덕이었습니다.
정의하는 <사물 사전> #
라디오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고 싶다는 꿈이었습니다. 그 시절 주류였던 팝송도 잘 몰랐고 가요, 영화음악, 클래식, 어떤 장르의 음악에도 특별한 조예가 있진 않았지만 음악은 거들 뿐, 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이야기가 그냥 다 좋았어요. 라디오 피디가 되고 싶어서 MBC KBS SBS CBS BBS TBS.. 방송국이란 방송국은 다 두드리며 (소위) 언론 고시에 뛰어들었습니다.
나름의 성과로 최종 면접에 붙어서 지긋한 MBC 부장님들 앞에서 ‘별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던 순간도 있었지요. 그 때 한 면접관님이 저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분 눈빛이 꽤 훈훈해서 ‘별밤’ 제작진이었나 그런 상상도 해봤고, 잘하면 붙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최종 결과는 쓰디 쓴 탈락!
언론 고시 재수에 접어들었지만 대학 졸업도 하고 소속도 없는 처지에 돈벌이는 해야 했기에 그 때 한창 시작된 IT 벤처 붐을 타고 학교 선배가 차린 사무실에서 일도 돕고, 또 KBS 라디오 심의국에서 운영하는 라디오 모니터링 일도 시작했습니다.
매일 2시간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DJ가 방송에 부적합한 말을 했거나 게스트가 말실수를 했거나 혹은 음악 끊김 등 기술적인 사고 등을 모니터링해서 다음날 새벽 전에 방송국으로 팩스 보고서를 보내는 일이었어요. (팩스는 PC 통신 모뎀을 통해 보냈던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집에서 PC 통신이 가능한 환경은 흔치 않았습니다. 1세대 컴퓨터 키즈였던 오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주로 피디 작가 지망생이나 국어 전공 등의 경력 있는 사람들을 일년 단위로 고용하는 형태였는데, 피디 재수생이었고 국어 전공이었던 저는, 시간 자유롭고 보수도 꽤 좋았던 꿀 보직을 운좋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 2-3시간 투자해서 3-40만 원의 월급을 받았으니 시급으로 치면 5천원 정도가 되는데 그 때 물가에 이 정도 시급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감은 잘 안 잡히지만, 이 일이 아니여도 늘 라디오를 끼고 살았을 저에게는 가장 좋아하는 일로 돈도 버는 정말 꿀 같은 일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스운데 "난리 났어요" 같은 친근한 생활 말투도 방송 부적합 멘트도 모니터링 대상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사실 2시간 방송을 샅샅이 들어도 별다른 보고 거리가 없을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 흔하게 보고했던 단골 멘트였습니다. 이 멘트조차 없을 때는 모니터링했다는 확인용으로 선곡 리스트를 보내거나 코너 아이디어나 의견을 보내기도 했어요. 물론 이런 내용은 심의국 담당자들이 큰 관심을 가져 주진 않았지만요.
방송국 시험 준비도 하고 벤처 사무실 알바도 하는 바쁜 피디 재수생이 매일 실시간으로 들을 순 없었으니, 예약 녹음을 할 수 있는 라디오가 필요했습니다. 시계 다이얼을 맞추고 예약 버튼을 꼭 누르면 그 시간에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가며 녹음을 해줍니다.
사실 사건 사고도 많았어요. 공테이프 넣는 걸 깜박했다거나 테이프 줄이 꼬였거나 해서 녹음이 하나도 안된 적도 있었어요. 지금이야 생방송과 거의 동시에 다시 듣기가 올라가는 세상이지만 그 때는 녹음을 못하면 다시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방송 사고 잡으려다 내가 사고를 치고 말았지만 솔직하게 못 들었다고 자백하기보다는, 공부하거나 일하면서 대략 들었던 풍월로 모니터링 내용을 채워 넣었던 적이 더 많았습니다. 늘 공기처럼 내 곁에 있었던 라디오였기에 그 날의 코너와 주요 선곡들을 기억할 수 있었거든요. 지금 떠올려보니 그 당시보다 더 진지한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한 편 어릴 때 무모했고 뜨거웠던 라디오 키즈가 그립기도 합니다.
노력하고 꿈꿨지만 방송국 시험 재수도 끝내 실패하고 때마침 닥친 IMF 때문에 방송 관련 신입 채용은 모조리 취소된 상황에서 졸지에 갈 곳 없는 처지가 된 저는, 당시 일을 도우며 들락거렸던 선배 벤처 사무실에서 자연스럽게 직장인의 삶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서비스 기획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정식으로 일 했던 한 동안도, 라디오 모니터링 일을 몇 년은 더 했었습니다. 특별히 방송국 구직 활동은 안하더라도 라디오 관련 일을 하는 건 제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되었거든요.
그렇게 미련을 못 버리고 곁에 꼭 끼고 있던 이 아날로그 라디오는 강산이 두 번 바뀐 지금도 우리집 거실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오래된 소리가 참 좋아요. 아침에 거실에 나오면 제일 먼저 이 라디오 ON 버튼을 누르고 89.1 주파수를 공들여 맞추고 이현우의 음악 앨범을 듣습니다. 음성으로 부를 수 있는 디바이스가 집에 널려 있고 스테레오 음질 빵빵한 오디오도 없진 않지만, 녹음 예약 기능이 필요 없게 된 지금도 이 아날로그 라디오를 듣습니다.
몇 초는 딜레이 되어 나오는 것 같은 DJ들의 목소리, 담요를 머리까지 둘러 덮고 접선하는 해적 주파수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은 둔탁한 음악 소리를 참 많이 좋아해요.
방송국 라디오 스튜디오 안, 큰 마이크를 잎에 두고 디제이가 유리 넘어 피디와 작가들과 눈을 맞추며 가지런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고,
턴테이블 위 LP는 둥글둥글 돌고 있고, 전화 연결된 청취자가 신청한 음악 CD를 뽑아오느라 방송국 어느 층의 앨범 라이브러리로 뛰어가는 제작진이 복도에 보이고,
스튜디오 밖 청취자들이 가느다란 실로 무수히 이어진 종이컵을 귀에 대고, 웃고 공부를 하고 잠이 들기도 하는 풍경
그런 풍경, 그런 공간, 그런 시간을 늘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은 누구나 방송을 만들 수 있는 1인 미디어 시대, 사실 지금이라도 당장 라디오 프로그램 포맷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팟캐스트를 시도해보면 어릴 적 꿈을 실현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꿈은 저 아날로그 라디오 안에서 여전히 살고 있고, 어쩌면 그 안에서만 꿈틀거리는가 봅니다.
2020 겨울 1일 1 그림 노트에 그려진 라디오를 2022 겨울 햇살에 다시 담아 봅니다.
LG fOOTY 라디오야, 넌 나의 꿈이었고 꿈의 조력자였고, 지금도 조용히 나를 토닥여 주네. 고마워, 오래 오래 내 곁에 있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