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 시작된 요즘 며칠 사이 비가 오락 가락 하더니 오늘은 비가 멎었다. 그동안 미루어 왔던 미술관 출입을 하기로 하였다. 행선지는 노르웨이 화가 뭉크를 모셔온 예술의 전당.
가끔 해외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작품들이 국내에서 소개되는 경우가 있다. 관람료가 아주 저렴하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작품들을 보려면 시간을 내서 비행기를 타고 가서 현지 호텔에서 묵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거의 공짜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해외여행 중에 그런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를 수도 있는데 일정상 시간을 내기 쉽지 않고 설사 시간을 내도 바쁜 일정상 느긋하게 관람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자유여행이 아니라 여행사의 패키지여행인 경우 여행지에 도착하면 부리나케 화장실에 들르고 인증 사진 한판 찍으면 어느새 여행가이드가 '빨리 모이라'고 다그친다. 이에 비하여 국내에서 이런 전시물을 관람하게 되는 경우엔 느긋하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나는 장애인등록증이 있어 관람료가 할인되는 경우도 많으니 이런 기회를 놓치기 아깝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미술관 오디오가이드를 거의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불특정 다수인이 사용하는 이어폰을 사용하는 것도 찜찜하고, 남이 써놓은 대본을 마치 AI같이 기계적으로 읽어대는 것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미술관도슨트가 될 일도 없을 텐데 그림에 대한 설명을 열심히 공부할 일도 없다. 더욱이 중요한 이유는 그림에 대한 설명에 신경 쓰다 보면 정작 감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술작품을 관람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어떤 ‘느낌’을 받는 것인데 작품설명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정작 ‘느낌’도 없이 관람을 마칠 수도 있다. 작품에 대한 지식적인 부분은 책이나 인터넷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유럽에 있는 미술관을 다녀보면 어느 미술관이나 뭉크의 그림이 한두 점 정도는 눈에 띄였는데 이번 국내 전시에서는 뭉크의 그림을 총 망라하여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니 좋다.
'뭉크'라고 하면 쉽게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다리 위에서 귀를 막고 절규하는 듯한 해골 모습의 사람이 있는 그림’
우리에게'절규'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불안한 인간의 심리를 테마로 하였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그 무엇을 끄집어내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칼라로 그려진 '절규'는 보이지 않고 판화본만 보인다. 아마 그 작품은 노르웨이 국보급 작품이라 해외 반출이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평일 오후 시간대라 관람객들이 그리 많지 않아 좋다. 나는 미술 사조를 모른다. 뭉크의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무슨 학파에 속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는 단지 뭉크가 인간의 절망이나 불안을 어떻게 느끼고 표현하였는지를 살펴보러 간 것이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우리와는 아주 먼 북유럽 노르웨이에 살았던 그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현재 우리와 어떠한 공통분모가 있는지 궁금하였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살았을까? 그가 우리와는 인간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겠지만 죽음, 이별, 배신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점이 비슷할까?
전시장을 한 바퀴 둘러본 느낌은 역시 ‘뭉크’ 답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뭉크에 대한 이미지와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림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모두 혼이 나간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서인지 절망스러운 상태에 빠져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 법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림 속의 사람들을 보면 대게 눈동자가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거나 휑한 표정으로 그려져 있다. 등장인물은 모두 영혼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짓거나, 몽유병환자처럼 흐느적거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절규(판화본)
그의 그림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뭉크 자신이 접한 가족의 죽음, 이별, 상처등 그가 느꼈던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뭉크는 여러 번 이별, 배신 등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의 내면세계를 부끄럼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공감하게 하는 것을 보니 '대가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뭉크가 그린 그림은 현대인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을 수 있는 마음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치유되지 않는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고 한다.
두사람.외로운 이들
숲을 항하여 II
불안과 절망에 이르렀을 때 남녀가 서로 포옹하면서 위로하는 듯한 그림도 보인다. 때로는 연인 사이에 서로 마음의 거리가 생겨 서로 마음이 전혀 교감하지 못하는 듯한 남녀의 그림도 보인다.
질투 II
뭉크의 그림을 보다보면 우울 그 자체일 것같다. 우울할 때 뭉크의 그림을 보면 더 우울해질까?
어떤 이들은 기분이 우울할 때 생동감이 느껴지는 음악을 들어야 하고, 화사한 그림을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나의 취향은 그렇지 않다. 우울할 때는 우울한 음악을 듣고 싶고 우울한 그림을 보고 싶다. 우울한 음악을 듣고 우울한 그림을 보아야 나의 내면세계가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런 경우 나는 생동감이 넘치는 비발디의 '사계'도 좋지만 회색빛의 우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차이코프스키의 '6번 교향곡 비창'이 더 좋다.
우리는 작품을 통하여 작가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투영된 나의 상처를 들여다보면서 나의 상처가 공감받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지 모른다. 오늘의 나들이는 꽤 쓸만한 나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