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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사 Jan 19. 2023

발리에 글 쓰러 왔다

떠나니까 보이는 듯한 잔상에 가까운 생각들

오랫동안 브런치 글을 쓰고 싶었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가 뒤늦게 시작하는 방학 숙제처럼 언제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 11월에는 건전한 습관을 만들어 보겠다고, 50일 정도 매일 3km를 달렸다. 이 시기에는 달리면서 머릿속에 글감들이 매일 떠올랐다. 급하게 적은 메모장의 메모는 쌓여갔지만 정작 글을 쓸 시간을 내는 게 쉽지 않았다. 뭔가 멋진 것이 쓰고 싶어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준비된 순간은 오지 않았고 새해가 왔다. 못다 한 일들은 모두 뒤로 하고, 나는 발리에 왔다. 발리에서는 총 2달을 보낼 예정이고 이미 3주 차를 보내고 있다.





그러려고 그랬나


불운한 사건들로 인해 나는 여행 초반부터 다리를 다쳤고, 서핑은커녕 수영장 물에조차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서핑 캠프에 돌아온 지 단 이틀 만에 캠프를 그만두고 짱구에 이사를 왔다. 컨디션은 별로지만 덕분에 글 쓸 시간은 보장될 수 있었다.


가끔은 어떤 흐름이 느껴질 때가 있다. 어렸을 때는 나아가는 ‘길’이 있다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주에서 보는 ‘운의 흐름‘과 꽤 비슷하다. 직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떠오른다. 친할머니는 무당을 자주 만나러 가셨다. 평범하지 않은 절을 다니시면서 주기적으로 기도를 올리셨고 무속적인 것들을 믿으셨다. 너무 믿다 보면 보이는 게 있는 건지 잘 모를 일이지만, 가끔 신기 있는 꿈을 꾸시곤 며느리인 엄마에게 쓴소리를 하셨다. 나는 그런 건 없고 무교이지만 직감이 좋은 거 같다.




좋아하는 말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Everything happens for reasons.


이 한 문장으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을 어렴풋하게나마 설명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시간과 환경은 모두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해외에서 홀로 있는 시간


발리까지 와서 글을 쓴다. 글을 쓰러 발리에 왔다.

글을 쓰는 일은 혼자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 혼자 있는 일에 아주 익숙했다. 중학교 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혼자 해외 기숙사에서 생활했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 일어나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쉬는 시간이고 편안하며 익숙하다.





과감한 내향인


서핑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디지털 노마드도 아니면서, 별다른 관광도 하지 않고 발리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내 모습이 특이하게 보일 거라는 건 알고 있다. 나는 전형적으로 내향형인 사람이면서도, 외향형보다 과감한 선택을 할 때가 많아 서 그런지 더 그렇게 보인다. 그런 과감함은 아빠에게서 받은 유전 형질이 틀림없다. 이건 내 사주 안에서는 편관의 특성으로 자리 잡고 있고, 일지 축토 속에 지장간으로 숨겨져 있다.


아빠는 완전한 무관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돌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다.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나도 무관으로 태어났다. 무관이긴 하지만 나는 지장간에 숨겨진 편관이 하나 있다. 사주 여덟 글자 안에 관이 없는 것을 무관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처럼 어떤 형태의 라이프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내가 편한 방식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신강한 사주일 수록 사고의 중심 축은 자신에게 있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는 편이기 때문에 남들과 비교하는 일도많지 않다. 조직보다는 혼자하는 직업이나 개인 사업이 잘 맞는다.


엄마처럼 세상 모든 걱정을 안고 살지만 아빠처럼 겁 없는 모습을 가진 모순된 사람으로 태어나고 말았다.





나의 여행 목적은 3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관광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발리에 말 그대로 살러 왔다. 지금은 예전처럼 마음껏 놀 수 없다. 놀 마음은 오히려 별로 들지 않는다. 해내고 싶은 일의 무게가 지금 가진 내 능력에 비해 무겁기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나는 1. 바른생활 습관을 만들고 2. 내면이 가진 목소리를 찾고 3. 표현력을 기르는 일에 온 힘을 보태야 한다.


마치 글쓰기 캠프에 온 것처럼 집을 벗어나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지금 쓰는 글들은 아직은 대단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가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 그리고 혼자라 해도 왜 외롭겠는가?

친구도 있고, 남자친구도 있고, 가족들도 건강히 있다. 물리적으로 멀리 있지만 나는 그들과 멀어지지 않고, 우리가 멀어지지 않을 관계라는 걸 안다. 혼자 있으니 그런 것들이 보인다. 내가 혼자인 것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가봤던 카페를 찾다


날씨가 너무 화창하고, 따듯하고 바람도 기분 좋게 분다. 피부가 얇아서 건조함을 쉽게 느끼는 나는 더운 습한 발리의 날씨가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숙소에서 바이크로 5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 왔다.

3년 전에도 방문했던 곳이다.

창문 없는 오픈된 형태의 건물 2층에 자리를 잡았다. 분명 건물 안에 들어왔지만 바깥에 앉아 있는 거나 다름이 없는 공간이었다.





늦은 점심을 즐기는 관광객들로 가게 안은 아주 붐볐다. 코로나 이전보다도 손님은 더 많아졌다. 이제 그 누구도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는다. 모든 게 정상화된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치 지난 3년 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코로나, 전쟁 그리고 기후변화에 대한 걱정, 나만의 진로 걱정, 결혼, 노견이 된 럭키의 심장병, 약해진 체력 등

3년 사이에 참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정작 이곳은 공기에서 나는 냄새까지 예전과 같다.


위화감을 눈치챈 순간부터 글을 쓰는 이 순간이 좋으면서도 왜인지 좋지만은 않았다.

발리가 좋지만, 마냥 좋기만 할 수 없게 된 다소 복잡해진 내 사정과 비슷하기 때문일까? 아마도 이번 여행의 불가분적 테마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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