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갓 대학을 졸업하는, 아는 동생이 자기소개서를 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순간 자기소개서를 썼던 때가 언제였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운이 좋은 걸까? 나에겐 자기소개서를 썼던 경험이 없다. 친오빠의 자기소개서를 다듬어 준적은 있어도 나의 스토리를 써 본 적은 없다. 과연 경험이 없는 나에게 조언을 받는 게 도움이 될까 싶어, 자신 없는 말투로 “읽어보긴 할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라는 말로 응답을 했다.
아끼는 동생이라 성의는 보여줘야 할 듯싶어 정독했다. 별로 할 말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를 위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아무리 초안이라고는 하나 짜깁기를 한 듯한 미완성의 글이었다. 그녀만의 자기 서사가 보이지 않았다. 스튜어디스가 꿈이라고 하나, 그녀의 갈망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고, 그녀만의 ‘특별함’도 없었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천편일률적인 글이었다. 어떤 말로 난도질을 해야 덜 기분이 나쁠지 잠시 고민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뗐다.
“지은아, 자기소개서 몇 번이나 고칠 생각이니?”
“한 세 번이요.”
“겨우 세 번? 딱 열 번만 고치자. 너 이외수 작가 알지? 그는 50번이나 퇴고를 한 대. 글은 계속 고쳐야 글다운 글이 나오는 법이거든. 너의 글을 보면 짜깁기를 한 티가 나. 예전에 쓴 글을 이용해 새로운 질문 유형에 변형해서 쓰려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연결이 안 되지? 아직 사흘 시간이 남았으니, 다시 너를 자세히 들여다보렴. 그리고 완전히 새로 다시 썼으면 좋겠어. 사실 내가 대신 써주고 싶지만, 너의 이야기 때문에 난 쓸 수가 없어.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너의 이야기를 내가 쓸 수 있겠어. 다만, 다른 사람은 이야기할 수 없는 너만의 특별한 경험을 글 속에 녹여냈으면 좋겠어. 지은이만 할 수 있는 이야기 말이야.”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 ‘내가 조금 심했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사실, 내가 방금 요구했던 것은 나도 하기 힘든 숙제였다. 글을 잘 쓰고 싶지만, 나의 생각의 밑천은 자주 바닥을 드러냈다. 경험의 돌려막기가 한계에 달할 때, 글감은 고갈 났다. 그럴 때마다 하얀 종이 위를 빽빽한 글씨로 차곡하게 채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떤 내용으로 채워야 할지 모를 때, 그때는 글쓰기를 멈추고 내면에 묻고 또 물어야 했다. 간신히 생각의 망울이 터졌을 때도 그 생각을 담아야 할 언어는 늘 빈곤했다. 겨우 한 문단을 완성했다가도, 그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늘 하는 꼼수는, ‘어떻게 하면 예전에 쓴 글을 이용해볼까’였다. 내가 한동안 시간과 공을 들여 가지런히 쓴 글을 송두리째 지우고 새로운 내용으로 다시 채워야하는 것은 언제나 고역이었다.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었고 지치는 일이었다.
사실 그 말을 하면서도 그녀가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상’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원서접수 마지막 날, 그녀가 최종 작성했다며 원고를 보내왔다. 언니 덕분에 10번은 수정한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며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정말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낸 원고에는, 그녀의 진짜 스토리가 살아있었다. 특히, 두 달 전 그녀가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 아버지가 쓴 편지를 인용하였는데 그 문구가 가슴에 꽂혔다. “항상 주변 사람을 돌아보고 낮은 곳에 있는 자를 살펴라.” 그녀는 아버지의 말씀처럼 남을 돌보고 배려하는 승무원이 되겠다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녀가 거의 사흘 동안 자기소개서를 쓰고 또 고치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열정에, 글쓰기에 대한 한동안 식어졌던 나의 마음도 달아올랐다. 예전에 썼던 글을 재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내면을 돌아보고 완전히 새내용으로 글을 채우는 그녀를 보면서,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설령, 그녀가 불합격한다고 해도 그동안 그녀가 붙들고 늘어진 시간동안, 그녀는 한 뼘 성장한 거니 그게 의미 있는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1984의 저자 조지오웰의 말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는 “인간이 물질세계는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며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비록 나는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고 취업을 했지만, 자기소개서 때문에 고민하는 많은 청년들에게 그의 말을 꼭 들려주고 싶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그 시간이, 머리를 쥐어짜는 고통스러운 시간일지라도 ‘스스로에 대한 탐사’를 하는 소중한 시간으로 여겼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