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인 형을 둔 32세 동생의 글
희생하며 산 엄마와 사회에게 보내는 편지
나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한 순간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자주, 불쑥 찾아오는 기억. 그 기억은 바로, 친구가 자기 동생이 자폐인임을 나에게 처음 밝혔던 순간이다.
때는 2000년,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이다. 너무 오래전이고 너무 어렸을 때라 친구의 이름도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선명하다. 평소 절친한 사이였던지라, 학교에서만 놀기 아쉬웠던 나는 친구에게 우리집에 가서 더 놀자고 했다. 그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 사실 동생이 자폐인이야. 그래서 학교 끝나고 가서 봐줘야 돼."
그 말을 듣고 난 멈칫했다. 두가지 감정이 모두 들었기 때문이다. 안도와 당황. '나만 자폐인 형제자매를 둔 게 아니구나'라는 안도와 '자폐인 동생을 왜 친구가 돌보지? 나는 형을 안 돌보는데?'라는 당황.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후자의 감정이 더 짙어졌다. '자폐인 동생은 동생이고, 노는 건 노는건데 왜 저러지?' 그렇게 위와 같은 일이 반복되며 그 친구와는 사이가 멀어졌다.
그때 친구와 내가, 비슷한 상황임에도 달랐던 이유는 좀 더 큰 다음에 알게 됐다. 엄마와 아빠는 언제나 나를 '자폐인 형의 동생'이 아닌 '그냥 나'로서만 바라봤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인생을 살면서 내린 모든 선택들에 형의 존재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걸 부모님이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달랐다. 훗날 엄마에게 들은 바로는, 친구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고려할 요소는 언제나 자폐인 동생이었다. 친구의 부모님은 그를 '그냥 그'가 아닌 '자폐인 동생의 형제자매'로 바라본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갑자기 전학을 간 것도 동생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달랐다.
나이가 들면서 다른 자폐인 형제자매들도 많이 알게 됐지만, 대부분 친구와 비슷했다. 자폐인 누나 때문에 계속 전학을 다녀서 친구를 많이 못 사귄 동생.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매일 자폐인 동생에게 밥을 차려줘야 했고, 그 때문에 자기 시간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누나. 그리고 부모님의 온신경이 자폐인 형에게 쏠려, 어렸을 적에 자기의 꿈을 지원받지 못한 동생까지. 형이 전학을 가서 학교가 집에서 멀어졌어도 대중교통을 타고 알아서 매일 먼 길을 등하교했고, 부모님이 저녁에 없으면 형은 알아서 밥을 사먹든 해먹든했고, 내가 하고싶은 것에 대해선 지원받을 수 있는 범위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받은(재수 지원, 취준 지원 등) 나와는 너무 달랐다.
물론 이 글은 다른 자폐인 형제자매와 나를 비교하며 더 낫다고 말하는 의도가 아니다. 위와 같은 삶이 가능했던 건 전적으로 부모님, 특히 엄마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형과 나를 키웠던 엄마. 자폐인을 사회인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과 '자폐인 형의 그늘'에 동생이 갇히지 않기 위한 노력, 그 두 가지의 노력을 동시에 한 엄마 말이다. 그 덕에 형은 지금도 열심히 사회활동을 하는 중이고, 나는 늘 꿈꾸던 삶을 (방송국 pd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사는 중이다. 친구가 자폐인 동생이 있음을 밝힌 날 느낀 당황은, 지금 엄마에 대한 고마움으로 바뀌어있다. 이 글은 엄마를 향한 감사의 편지다.
그리고 사회를 향한 부탁의 편지다. 사실 엄마의 두 가지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건 기적에 가깝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었고, 사회의 지원은(특히 성인 자폐인에 대한 지원) 턱없이 부족했다. 오로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엄마의 정신력과 아빠의 부족함 없는 지원으로 이뤄낸 기적이었다. 이를 위해 엄마는 커리어를 포기했고, 아빠는 쉬지않고 일했다.
하지만 자폐인 가족이 평범한, 순탄한 삶을 살려면 이런 기적이 필수다. 대부분 현실적인 여건 상 위의 두 가지 노력 중 한 가지에 집중하는 부모님들이 많다. 그 결과 자폐인이 다행히 사회인이 되더라도, 다른 형제자매는 항상 희생하는 삶에 지쳐 늘 우울해하거나 부모님에게 적대감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형제자매는 잘 사는데 자폐인은 방치되어, 훗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폐인 돌봄 관련해서 다툼이 많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자폐인과 형제자매 둘 다 힘들게 살아가는 경우는 더 많다. 사실 이쪽이 절대 다수다. 순탄함은 물론 평범함은 요원하다.
그래서 난 이 글을 썼다. 엄마에게 감사를 표하고, 사회에 부탁하고 싶어서 말이다. 더이상 희생으로 쌓아올린 기적에 의존해선 안 된다. 두 가지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사회의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자폐인 부모님들은 뭔가를 잘못해서 자폐인을 낳은 게 아니다. 그리고 특별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 다른 비자폐인 가족과 같은 출발선에 서고자 하는 것,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