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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사슴 Jun 26. 2024

대중음악, POP MUSIC

Chapter I -3

팝송이라는 단어를 흔히들 말을 하지는 않는 요즘이지만, 옛적에는 꽤 흔히들 이야기하고는 했었다. 주로 영어로 된 영미권에서 특히 미국에서 유행하는 유행가이면서 국내에서도 흔히 라디오나 길거리 혹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을 칭하지 않았나 한다. 이는 국내에서 만들어진 가요나 음악에 대비되는 느낌으로 보다 약간 세련된 급이 높은 듯한 느낌으로 흔히 “너는 팝송 들어? 좀 멋진걸”이라는 느낌이 전해지는 한국의 음악과는 약간 다르지만 되게 친숙한 음악이었을 것이다.


조금 살짝 떨어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실제로는 영미권 음악이라고 할지라도, 실제로 영국에서 유행하는 음악이라고 보기보다는 미국에서 유행하는 음악이 대부분이었다. 팝송이라는 단어를 흔히들 사용하던 2000년대 이전의 국내의 상황은 영국 음악시장을 반영하는 채널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음악일지라도 영국의 차트에서 흥행하는 것이 아닌, 미국의 빌보드에 흥행하는 음악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미국의 빌보드에서 흥행하지 않더라도, 국내의 미디어에서 영화음악, 광고음악으로 사용되고 그것이 대중들에게 널리 각인되면서 국내에서 유행하게 되는 영어로 써진 영미권의 음악이 국내 한정으로 유명하게 되면서 그것이 한민족 몇천만의 뇌리에 깊숙이 남게 되며, 위대한 팝송으로 남게 되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 다른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로 된 음악을 소개한다는 것 자체는 굉장히 어려웠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라고 한다면, 중국어, 일본어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이외의 언어는 한국인에게 설득력이라는 측면에서 확장성이라는 측면에서 상업적으로는 크게 효과가 없다.) 일본 음악은 팝송이라는 영미권음악이 국내 음악보다 다소 세련된 음악의 인식을 가지고 있을 시점에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어 음성적으로 그 명맥을 대한민국의 일부 특권에게만 주어지는 달콤한 금기의 열매였다. 중국음악은 지금도 비슷하지만, 중국음악 자체가 영미권음악과 비교하여 크게 매력이 없을뿐더러, 중국어에 대한 수요도 없었고, 그것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장벽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홍콩영화에 사용된 여러 훌륭한 음악들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지만, 영화음악이라는 한계에 머물러 있었음과 동시에, 이 또한 국내 영화 배급사, 혹은 영화음반을 발매하는 음반사의 전략아래에 놓여 있었다. (일본음악의 국내시장 개방에 대해서는 하나의 큰 주제로 나중에 다룰 예정이다.) 다른 국가의 음악도 결국에는 영어로 음악을 발매하지 않는 이상, 영미권 시장에서 진입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금 한국어로 된 음악이 빌보드 차트에 올라가는 것이 어느 정도 신기하지 않게 된 상황이긴 하지만, 이것은 불과 최근까지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음이라.


왜 장황하게 팝송이라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나.


오래전 국내에서 이야기하는 팝송이라는 개념이 언젠가부터 사라진 무렵은 한국의 음악이 전에 언급한 팝송과의 간극을 없애면서부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미디어가 쥐어주는 음악환경에 노출되는 시점에서, 인터넷이 발달하고 미디어채널이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미디어가 거의 독점에 가까운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그 시기가 지나고, 청자들이 그 주도권을 좀 더 가져가기 시작한 시점부터라고.  


우리가 생각해 왔던 팝송은 결국에는 Popular Music, 대중음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반에 이야기했던 팝송은 국내의 다소 옛 시점의 정서에 기반한 팝송을 그 당시의 시대상을 빗대어 설명한 것이고,


그럼 대중음악의 본질은 무엇일까? 대중음악은 대중들이 즐기는 음악이다. 대중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사람들이며, 그들이 향유하는 특별할 것도 없고, 복잡하고, 특수하지도 않은, 그들에게 때로는 나름대로의 위로를,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슬픔을 제공하는, 희로애락의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공감하고, 공감받고 싶어 하는 음악가들의 외침을 각기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며, 그것으로 효용가치로 청자와 음악가 간, 그리고 청자와 청자 간 무한대의 상호작용을 하는 대중적인 음악인 것이다.


그 대중음악에는 희로애락이 관통한다. 그리고 그 희로애락은 그 작금이라는 시간의 상황을 반영하고, 국가 지역적인 특성을 반영하며, 심지어는 국제적인 정서를 반영하며,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투영하여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개인의 특성이 반영된 지극히 개인적인 음악을 추구할지언정, 그 음악의 지역, 국가, 시대, 현안 등을 분리하여 만들어지기는 극히 어렵다. 음악가는 본인이 태어난 순간부터 그것에 인지하던 하지 않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의 음악가의 음악들이 한국인에게는 묘한 공통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며,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 현상.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 한낱 하나의 구성원이지만, 그 시대의 사건 사고들을 같이 숨 쉬고 느끼면서, 그것을 누군가는 노래하고 표현하며 우리는 공감한다.


대중음악은 결과적으로는 상업적, 자본주의와 함께 하는데 이는 차후에 하나의 주제로 다룰 예정이며, 그렇지 않은 상업성을 추구하지 않는 순수한 음악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우리나라의 국악은 사실 국민의 세금으로 보존하고 국가에서 지키고 육성하려고 하는 음악이다. 주변에 국악에 심취한 사람이 있는가? 그런 음악들도 대중음악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을까? 우리의 전통음악이지만, 오히려 보존하고 누군가는 계속해나가야 한다는 그런 현실이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낸다. (음악을 듣다 보면 국악도 듣게 되는 이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차후 하나의 토픽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아티스트가 나는 상업성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대중음악이라고 볼 수 없는가? 그런 이분법적인 잣대는 없다. 대중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이며, 그들이 향유하는 음악에 규정과 잣대를 들이대기에는 그 규정과 잣대를 누가 만들 것이며, 그렇다 한들 그것이 칼로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시대를 만들어 나가듯, 음악, 우리들, 국가, 시대 (혹은 시대정신)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계속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팝송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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