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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유목민 Jul 15. 2022

죄책감

나를 무너뜨리고 일으켜 세우는 것

집에 가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나를 멈춰 세운다.


"이 버스 정류장에선 00으로 갈 수 있나?"

어디 가시냐고 묻자 00리로 가신다고 했다.


지도 어플 검색 결과 나타나는 수없이 많은 00리 중에 가장 가까운 동네 하나를 골라 할아버지께 보여드려 확인 후 길안내를 시작했다.


길안내를 마친 뒤 집에 온 나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00리에 큰 기도원이 있는데 거기로 가려고"


뒤늦게 생각난 할아버지의 중얼거림에 다급하게 '00리 기도원'을 검색한 내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다.


'00리 기도원'이라는 기도원은 00리에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버스 정류장으로 가봤지만 이미 버스를 타고 가신 뒤였다.

말도 안 통하는 다른 나라에서 길을 잃었을 때의 막막함이 나를 엄습했다. 더운 여름날 할아버지께서도 느끼실 감정이라고 생각되자 마음이 심란했다.


'차라리 잘 모른다고 정중히 거절하고 갔으면 적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을 텐데....'

'기도원에 가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확실히 한번 더 확인하고 안내드렸어야 하는데....'


점심을 먹는 와중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이 감정, 낯설지 않고 너무 익숙했다. 이 감정을 느낀 이후에는 난 자주 주저앉곤 했기 때문이다. 이 감정을 오래 바라본 뒤에야 나는 이 감정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감정 때문에 나는 가족,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조금씩 도망쳤었고, 브런치도 잠시 쉬게 된 것 같다. 모든 나쁜 소식은 결국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생각, 그래서 나에게는 사랑이 아니라 회초리가 필요하다는 생각, 나는 쓸모가 없다는 생각 등 과장된 확대 해석도 이 감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또 그런 악순환에 빠지기 시작할 때 나에게 문득 떠오른 시가 있었다.


넘어져 본 사람은                      
                        이준관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서 무릎에
빨갛게 피 맺혀 본 사람은 안다
땅에는 돌이 박혀 있다고
마음에도 돌이 박혀 있다고
그 박힌 돌이 넘어지게 한다고

그러나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서 가슴에
푸른 멍이 들어 본 사람은 안다
땅에 박힌 돌부리
가슴에 박힌 돌부리를
붙잡고 일어서야 한다고
그 박힌 돌부리가 일어서게 한다고


할아버지는 나에게 돌부리를 알려주셨고, 나는 이제 나를 포기하게 만드는 돌부리를 알게 되었다. 

비틀거리며 돌부리를 바라보고 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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