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서도 안 되고 늦어서도 안 된다면
프로토타입, MVP, 프리토타입이라는 단어에 익숙하다면 완벽한 제품보다 빠른 시장 반응 조사와 민첩한 대응, 시장 선점이 중요하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왔을 것이다.
내가 지겹도록 들어왔던 피드백도 내 작업 속도가 느리다는 피드백이었다. 품질보다는 속도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나는 정말로 품질보다 속도가 중요한 상황에 처한 것일까?
경쟁자보다 빨리 기능을 내놓는 것이 중요하지만, 매우 빠르게 프로젝트를 끝내려다 성능과 기능이 동작하지 않으면, 심지어는 기존에 잘 되었던 성능과 기능에도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빠르게 내놓아 봤자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어 내 입장에서는 내 개인 브랜드에 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시장에 나온 지 오래된 상품이고 기능도 덕지덕지 추가됐지만 아무도 테스트 방법, 사용법이나 주의사항을 정리해 놓은 적이 없는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한, 곧이곧대로 지저분하게(?) 빠른 작업만 해서는 내 실력이 늘 수도 없고, 경력 기술서에 쓸 내용도 없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했었다. 수년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누군가 "즐거운유목민님은 품질 지표 및 품질 이슈인 A, B, C를 개선한 경험이 있었나요?", "즐거운유목민님은 일하실 때 X라는 관점에서 작업하신 적 있으신가요?"라고 면접이나 채용 공고에서 묻는다면 "아니요"라고 대답하기는 싫었다.
서두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가 나에게 얼른 서두르라고 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 투입 리소스가 고정인 경우, 나에게 서두른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했다.
1. 일의 우선순위를 상향 조절한다.
-> "제가 A, B라는 일도 병행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서 서둘러 끝내면 A, B는 기한 내에 끝낼 수 없습니다."라고 협상 운을 띄워본다.
2. 일의 완료 기준(definition of done)을 하향 조절한다.
-> '이 정도는 되어야 해'에서 '이 정도까진 안 해도 되고 저 정도까지만 해'로 협상 시도해 본다.
-> 심지어 '이 정도는 되어야 해'에서 '이 정도는 신경 쓰지 말자(일하지 말자)'로 협상 시도해 본다.
인턴이나 사원으로서 이 시도가 성공한 적은 없었고, '그러게 애초에 기간을 길게 잡았어야 한다'는 답변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기간을 길게 잡아 달라고 하면....), 그냥 야근을 한 적이 열에 아홉은 넘었다. 그러다 결국 큰 사고를 낸 적도 있었다. 나의 체력과 에너지라는 투입 리소스가 여러 일에 분산되었으니 결국에는 일의 완료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게(심지어는 일의 완료 기준을 세우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일의 타이밍과 순서가 있는 정확함과 일의 타이밍과 순서가 없는 서두름에는 속도와 만족도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지 않을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만약 작업 시작 전, 중, 후에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 제때 올바르게, 정확히 이루어졌다면, 서두를 때보다 불필요한 이슈는 최소화되고, 소요 시간은 더 빠르고, 비용은 저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일을 제때 정확히 했어야 했을까?
바쁠수록 돌아가라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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